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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무계획 2001
2001-02-06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신현준

해가 바뀌니 다들 ‘신년계획’을 짜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담배를 끊겠다’, ‘운동을 하겠다’는 작심삼일형 계획부터 ‘올해에는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거창한 계획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계획을 세우는 모습이다. 별다른 계획이 없는 나 같은 사람마저도 스포츠신문에 나온 ‘올해의 별자리 운세’를 열심히 읽어대고 있으니 때는 때인 모양이다. 어른들께 인사를 올리는 자리나 시무식 같은 자리에 가도 ‘올해 계획이 뭐냐’는 질문을 서로 주고받는다. 신통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다들 건강에 신경써야겠다느니, 가족을 돌봐야겠다느니 등등 평소의 언행에 비춰보아 한입으로 두말 하는 것이 분명한 말들을 건넨다.

그렇지만 계획을 제대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실천은커녕 1년 전에 계획을 세웠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고, 그걸 들춰내는 일이 쑥스러울 뿐이다. 1년이라는 시간은 후닥닥 지나가버렸어도 1년 전이라는 시점은 아스라한 옛날 같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에 집착하는 이유는? 나의 분석은 ‘5개년 계획’으로 사육되고 ‘수출목표액 달성’에 감동하면서 자란 종자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정도다(그때는 ‘경제개발’뿐만 아니라 ‘문예중흥’도 정부의 5개년 계획하에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 원, 참).

그런데 언제부턴가 5년 정도가 아니라 매년, 아니 매번 새롭게 계획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 다른 나라 사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은 분명 그렇다. 그러니까 연간계획을 성공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박약하거나 능력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세상이 너무도 급속히, 그것도 예측할 수 없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불확실하다는 말은 진부한 말이지만 불확실성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계획이 불필요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불확실할수록 ‘자주’ 계획하는 게 삶의 지혜고, 목적지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달리 말해 철저하고 일관된 계획보다는 ‘언제나 뜯어고칠 수 있는’ 계획을 만드는 게 능사다. 한 예로 1997년 말 경제위기가 찾아왔을 때 ‘정말로’ 1∼2년 뒤에 호황이 찾아오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때 ‘한 3∼4년은 힘들겠군’이라고 생각해서 그저 버텨나갈 계획을 잡았던 사람은 ‘벤처’, ‘코스닥’ 열풍에 적응하지 못하고 끝내는 ‘배아픈’ 상황을 감내해야 했다. 역으로 1년 전만 해도 이 모양 이 꼴이 되리라고 미리 예상하고 ‘허리를 졸라매고 다시 뛸’ 계획을 잡은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1년 뒤에는 또 뭐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까.

그때그때 삶의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인생은 행복할까. 아마도 대부분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계획이라는 게 말이 계획이지, 실제로는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서 철퇴와 예봉을 피하고 안전한 은신처를 발견하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뇌세포의 주파수가 증가하면서 열량이 증가하고 혈압도 오를 것이다. 그래도 한국에서 계획없는 삶의 대가는 맵고 쓰다. ‘계획경제는 시장경제에 비해 후지다’는 이데올로기를 수없이 교육받아 왔지만 그건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야기다(비유가 맞나?). 반면 확고한 계획을 세우고 불철주야 일로매진하는 삶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계획이 불철저하고 일관성이 없다”는 말은 정부 정책에 대해 시비걸 때나 동원할 수사지, 그걸 자기 인생의 신조로 삼았다가는 시쳇말로 아작날 경우 대책 없다.

그러다보니 남들이 다 계획을 짜느라고 골몰하고 있는 이때 ‘특별한 계획없이 살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개똥)철학을 다듬게 된다. 계획이란 것이 목표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목표없는 삶이라고 해도 괜찮다. 그래서 계획없는 삶, 목표없는 삶을 살아가는 걸 2001년을 맞이하는 나의 계획이자 목표로 삼았다. 언젠가 언급했듯 주변 환경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물처럼 유유히, 새털처럼 가볍게 지내는 삶 말이다. 무계획적 삶이 아니라 계획에 연연하지 않고 계획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말이다. 물론 새해 첫 글이라고 신년계획을 주제로 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발상부터가 계획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이런, 자가당착이라니).

신현준/ 문화 에세이스트 http://shinhyunjoon.com.n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