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어느 한 나라에서 정부에 항거하거나 지배체제를 전복하려던 꿈을 꾸다 체포를 피해 도망쳐야 했던 사람들이다. 망명, 여전히 전복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혹은 전복을 꿈꾸던 삶을 등질 수 없어서 자신의 나라를 뒤로 한 채 이국 땅을 떠도는 행위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 자국 정부가 자신에게 할당한 지위에서 벗어나 떠도는 이탈자들이고, 새로운 체제나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고자 꿈꾸는 탈주자들이다. 그들은 최소한 자국 정부와 혹은 자신의 국가와 맞서는 위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정부와 맞먹는 지위를 가진 자들이다.
망명자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살지만, 다른 나라는 드나들 수 있어도 자신의 나라에는 드나들 수 없다는 점에서 여행자와 다르다. 또 그들은 자신이 태어났고 자신이 살던 나라를 벗어나야 했지만, 대개는 여전히 그 나라 안에서의 전복이나 저항을, 새로운 관계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산다는 점에서 이민자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 외부에 산다는 점에서 외부자지만, 항상 자신의 나라 안에서의 삶을 바꾸고 그렇게 바뀐 나라 안에서 살기를 꿈꾼다는 점에서 내부자다. 즉 그들은 외부이자 동시에 내부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 외부에서 살기에, 한 사회의 내부에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내부에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들의 시계가 망명하던 시간에 멈추어버린, 그래서 그렇게 할 능력을 잃어버린 경우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사는 나라의 외부자고 망명자, 난민이기에, 그 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어디서도 외부자다. 내부에, 그 친숙함에 안주하려는 것을 방해하고, 익숙함의 관성에 따라가는 것을 막는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나라, 혹은 자신이 사는 나라에 긴장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없는 것을 밀어넣는다. 그래서 무언가 다른 것이 만들어지게 한다. 그들은 언제나 저주받은 삶, 피곤하고 힘든 삶을 강요받지만, 그것을 좀더 나은 삶으로 되돌려준다. 비록 그것이 의도된 것은 아니라 해도 말이다. 망명자나 난민의 이러한 역할은 그들이 꿈꾸는 것을 실현하는가 여부에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어디서든 외부자라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망명자나 난민이 아예 없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원하는 누구나 쉽게 그런 외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 망명이 자유로운 사회. 그리고 되돌아오는 귀국도 자유로운 사회.
이런 점에서 보자면, 망명이 꼭 정치적 핍박과 목숨을 위협하는 억압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국적을 던져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일전에 내가 아는 한 선배는 붕괴한 소련으로 늦은 유학을 떠나면서 자신의 소련행을 “문화적 이유에 의한 망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귀국할 수 없게 하는 위협이 없다고는 해도, 이런 망명이 결국에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어낼 것은 분명하다.
이른바 ‘임시정부’를 자처한 망명자들에 의해 수립된 나라, 가장 저명한 정치지도자가 오랜 망명생활을 한 끝에 대통령이 된 과거를 가진 나라, 그러나 난민협정에 가입하기 전에는 물론, 뒤늦게 가입한 뒤에도 10년이 넘도록 단 한명의 난민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라, 그리고 미얀마의 망명자들처럼 정치적으로 곤혹스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난민보다는 불법체류자 다루듯 처리하는 나라, 목숨이 걸린 문제를 서류에 동그라미 치는 ‘서면회의’로 처리하는 나라, 난민된 사정이나 현재의 처지에 귀기울이기보다는 그가 돌아가도 결국 죽지는 않을 거라는(사람은 정말 얼마나 죽기 어려운 것인지!) 생각으로 안심하고 추방명령을 내리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사는 나라다. 이 나라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혹시 윤리적, 혹은 도의적 이유에 의한 망명자들인지도 모른다. 정말 난민이 필요한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