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조선족을 만난 것은 아마 중·고등학교 시절 버스터미널일 것이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던 중 한 아주머니가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웬일인지 사람들은 그녀를 슬금슬금 피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내쪽을 힐끔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거두고, 곁에 있던 인상 좋은 남학생에게 다시 질문을 건넸다. 그녀의 음성이 들려오자 내 머리에는 단 하나의 단어가 스쳐갔다. 북한 사람. 그랬다. 그때는 오로지 북한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처음으로 출장을 떠난 4월의 베이징에서 10일간 나를 인도했던 차량은 선양에서 만든 승합차 진베이였다. 진베이를 모는 베이징의 운전사는 하얼빈 출신 H 아저씨. 일과를 마치고 즐기는 양꼬치와 이과두주를 좋아하는 H는 먹고살기 위해 아들과 단둘이 베이징의 친척집에 기거한 지 반년째. 아내는 돈을 벌기 위해 홀로 인천으로 간 지 어언 4년째. 그는 나에게 “어떤 일도 잊지 않고 10년이 지나도 복수한다”는 중국 격언을 언급하며 중국인의 집요함과 무서움을 한국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꼭 여자친구와 함께 오라던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한편 나에게 콩카의 휴대폰을 빌려준 사람은 옌볜 출신 베이징 생활 8년차 N. 베이징에서 가장 난감했을 때 도와줬던 은인이다. 전화기를 돌려주던 마지막 날, 맥도널드에서 2시간15분이나 기다리게 한 일은 이번 지면을 빌려 재삼 사과하고 싶다. 한·중 합작드라마에 미술파트로 참여했던 그는 지금은 용접기를 만드는 회사에 사무직으로 출근하고 있다. 방송이나 영화를 다시 할 생각은 없다고. 한밤중 따산즈에서 차를 마시다가, 한국 기업과 그의 처우에 대해 진심으로 분노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급할 때는 동포, 월급을 줄 때는 조선족, 곤란한 일이 생기면 중국인”이라고. 그들은 한국인일까 중국인일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까. 비오는 밤 차오양공원 근처 수지웡 바에 동행했던 E. 옌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건너와 3년간 직장생활을 한 E는 지금은 건축회사에 다닌다. 동시에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공의 대학 2학년이기도 하다. 그도 한국 드라마 두편에 미술파트로 참여했다. 너무 힘들어서 방송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단다. 외모, 습관, 취향으로 보면 전형적인 서울내기 같은 E. 하나 그의 어머니는 한국인과는 절대로 결혼시키지 않는다고 매번 다짐한다. 왜일까? E의 말처럼 “한국인은 언제나 그저 왔다가 가는 바람”이기 때문일까. 세 사람은 모두 왕징(望京)에 산다. 왕징은 자금성을 기준으로 베이징 동북 외곽에 위치한 한인 밀집지역. 흡사 분당, 일산의 쌍둥이 같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고층 아파트가 무럭무럭 개발의 그림자를 넓혀가지만 그곳에도 한국인과 중국인의 불빛만 빼곡하다.
돌아온 서울. 우리는 어느 식당을 가도 조선족 아주머니와 마주친다. 하지만 N에 의하면, 현재 조선족들은 거의 한국 비자를 받을 수 없는 지경이라고. 칠순 노인이 고향에 가고 싶어도 불법취업을 근거로 관광비자를 내주지 않는 일이 많다고 한다. 출입국 관계자들도 애환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다시 한번 자문하게 된다. 그들은 중국인일까 한국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