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5일치 일본의 주간지 <플레이보이>는 ‘본지의 결단’이라며, ‘호리에몬을 총리대신으로’라는 헤드카피를 표지에 실었다. 커버스토리는 올해 최고의 화제인물로 떠오른 호리에 다카후미에 대한 이야기였다. IT기업 라이브도어의 사장인 호리에는 올해 초 <닛폰방송>의 주식을 대거 사들인 사건으로 모든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일본 5대 민방의 하나인 <후지TV>의 최대 주주인 <닛폰방송>을 지배하여, 장기적으로는 <후지TV> 자체를 끌어들이겠다는 속셈이었다. 일본 극우파의 미디어 본거지인, 후지산케이그룹의 <후지TV>를 노린 호리에의 야심은 일본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플레이보이>가 호리에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권력을 가진 노인들이 호리에를 밟아버리려고 총궐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전 총리인 모리는 “돈만 있으면 다 좋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는 생각은 지금 일본 교육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공격했다. “자유경제에도 룰이 필요하다”는 말도 나왔다. 금융청에서는 라이브도어의 주식 취득과정에 위법 가능성이 있다고, 총무성에서는 외자규제 강화를 검토한다고 떠들었다. 지금 일본의 ‘노인저항세력’들은 “방송은 공공성을 지켜야 한다, 외자를 등에 업었다, 방송과 네트의 결합은 말도 안 된다, 돈의 힘만으로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의도 없다”는 논리로 호리에를 공격하는 중이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기존 체제에 구애받지 않는 호리에가 싫다는 이유로 귀결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경제의 자유화, 글로벌 스탠더드, 성역 없는 구조개혁, 파괴 없이는 창조 없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지만, 현실은 전혀 다른 것이다. 호리에는 ‘회사는 주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란 자본주의의 원칙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고, <후지TV> 사장은 ‘일본자본주의’라는 용어로 맞섰다. 일본자본주의라는 말은, 유신 시절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권력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물론 호리에가 총리대신이 되는 것은커녕 <후지TV> 지배도 불가능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재일동포 손정의가 사장인 소프트뱅크가 <후지TV>의 백기사로 등장했고, 라이브도어의 주식도 떨어지고 있다. IT기업 1세대인 손정의는 기존의 경제체제에 복종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일군 개척자들이다. 반면 호리에는 과거의 질서를 무시하는 3세대로 분류된다. 공격적 M&A로 덩치를 불리고, <돈 버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 책을 쓰고, 좌파가 아니면서도 후지산케이그룹의 이데올로기를 무의미하며 낡았다고 공격하는 호리에는 확실히 불손하고 당돌한 신세대다. 그런 점이 바로, 일본인들도 호리에를 선뜻 지지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그런 호리에를, 일본의 지배계급은 인정하지 않는다. 지난해 새로운 프로야구단의 창단에서도, 라이브도어는 덜 공격적인 IT기업 소프트뱅크와 라쿠텐에 밀려났다. 게다가 호리에를 가장 지지하는 것은 젊은 세대가 아니라, 한때 혁명의 꿈을 꾸었던 50대의 단카이 세대다. 호리에의 도전은 달걀로 바위치기다.
그럼에도 <플레이보이>의 주장처럼, 나는 호리에를 지지한다. 내가 지지한다고 상황이 바뀌거나, 호리에의 성공이 일본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성공한다 해도, 나에게 별다른 영향도 없다. 단지 재미있어서다. 과거에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지금은 믿지 않는다. 그보다는 개인의 진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플레이보이>는 말한다. “호리에몬에게는 비전이 없다? 그러나 행동이 비전이다. 그가 지나가고 남는 것에는… 기존 모럴이 사라진 불타버린 초원이다… 일본을 독으로 물들여라. 그 다음은 우리가 무언가를 할 테다.” 어쩐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생각나지 않는가. 모든 것이 망가진 대지에서, 독을 통해서 정화되는 세계. 언젠가는….
아니 정화되지 않은들 어떠한가. 호리에의 시도 같은, 그런 무모하고 황당한 도전이 없는 세상은 너무 황폐하다. 극우파가 지배하는 세상을 뒤엎지는 못해도, 뭔가 시비를 거는 것이라도 필요한 것 아닌가. 그게 무정부주의적이건, 물신숭배주의건 상관없이. 세상은 여전히 지배자의 것이지만, 나는 거기에 야유를 놓는 누군가를 보고 싶다. 그의 사상에 전혀 동의하지 않더라도, 돈키호테와 불한당이 거대한 풍차에 무모하게 덤벼드는 풍경을 보고 싶다.
PS. 모 일간지에서 <플레이보이>의 기사를 약간 인용하며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주간지라고만 했을 뿐,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아마 <타임>이나 <아에라> 정도였으면 밝혔을 텐데, <플레이보이>여서 숨긴 게 아닐까? 권위주의란 건, 그런 때에도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