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병관이를 안은 김정희 원장이 동사무소 사회복지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6mm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이가 정호영 피디다. 황석주 기자
지난 22일 오후, 병관(7)이가 서울 용산구 후암동 동사무소에 들어섰다. 사무실 안에서 일을 보던 사람들의 눈길이 순간 병관이에게 쏠린다. 크루존씨병이라는 희귀병을 앓는 병관이의 모습 때문이다. 7살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몸집이 작고 약해보이는 병관이의 눈망울은 금세라도 쏟아져 내릴 듯 커다랗다. 얼굴 기형에 더해 머리 뼈가 자라지 않는 병 탓이다. 합병증 때문에 눈은 점점 앞으로 쏠리고 있다. 눈꺼풀이 덮이지 못하는 슬픈 눈엔 잔잔한 눈물이 고여 있다.
외주사 제작진 21명 구슬땀 치료기금 어느새 바닥 보여 방송시간마저 일요일 심야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거나 연민으로 가득 찬 많은 이들의 눈길과는 달리, 평정을 잃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애정이 담긴 시선이 병관이의 뒤를 따르고 있다. 정호영 피디의 땀기 어린 손에 잡힌 6㎜ 카메라다. 김정희 ‘가브리엘의 집’ 원장의 품에 안긴 병관이의 작은 움직임은 차근차근 카메라에 담기고 있었다.
정 피디와 조연출 박찬숙 피디는 아흐레째 병관이와 함께 지내고 있다. 앞으로도 족히 일주일을 이렇게 보내야 한다. 하루하루 힘겹게 희귀병과 싸우고 있는 병관이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은 5월8일 안방을 찾는다.
(위로부터) 광민이, 예진이, 하늘이, 유림이, 병관이. 아이들이 벌이는 희귀병과의 힘겨운 싸움은 버겁지만 희망은 웃음 속에서 빛난다.
에스비에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은 2003년 5월10일 출발했다.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는, 희귀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과 가난 때문에 치료를 포기할 위기에 놓인 가정의 절박한 사연에 귀기울이겠다는 뜻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이 프로그램은 외주제작사 HOW의 박종성 대표이사가 기획했다. 에스비에스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을 만들다 “보다 자유롭게 다큐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독립해 2001년 제작사를 차렸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고셔병을 다뤄본 터에, 사회적 무관심의 대상인 희귀병을 다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해보자”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을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을 위해 뛰는 이들은 모두 21명이다. 피디가 5명에 작가·보조작가·조연출이 각각 4명씩이다. 한 사람이 한달 남짓 기간에 한 편을 만드는 셈이다. 아이템은 각 지역의 복지관이나 사회복지사에게 추천을 받아 고른다.
다른 프로그램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솔루션 위원회’에 있다. 한국희귀질환연맹 대표이자 유전학 전문가인 김현주 아주대 교수가 위원장을 맡고 있고, 의료 전문가들과 특수교육 전문가, 사회복지 전문가, 변호사, 건설회사 사장 등이 각계 전문가로 참여하고 있다. 프로그램 시작부터 줄곧 함께 해온 이들은 일회적이고 시혜적인 차원의 장애인 돕기를 뛰어넘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희귀질환 아동들에게 1년여 동안 혜택을 주고 있지만, 돈 문제가 가장 안타깝고 시급하다. 한국희귀질환연맹에서 관리하고 지출하는 치료기금으로 2억여원을 모았으나, 프로그램 횟수가 늘수록 턱없이 부족해지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팀장인 이고운 피디는 “좋은 뜻을 가지고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기업체의 협찬을 가려가며 받겠다는 애초 뜻은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5월1일부터 방송 시간이 토요일 밤에서 일요일 밤으로 옮겨진다. 주5일제에 따라 일요일 밤 시간대가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이 방송사의 입장이지만, 많은 시청자들이 항의에 나섰다. “에스비에스에 그다지 많지 않은 공익적인 프로그램을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저녁 시간대는커녕 일요일 심야 시간대에 편성한 것은, 이 프로그램을 올해 10대 기획으로 뽑은 것과도 배치되는 일”이라고 말이다. 2년째 이어온 에스비에스 공익성의 마지막 보루가 홀대받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생각이다.
황현정 아나운서의 ‘아름다운 동행’
“방송 뒤 1년 안돼 떠난 현경이 웃음 되찾은 그 얼굴 기억 남아”
황현정 아나운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에 동행한 지 어느덧 이태다.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 있는 HOW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5년이고 10년이고 프로그램이 있는 한 계속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상한 뜻이 있어 진행을 맡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도 몰랐다”면서도 말이다. 여느 프로그램 진행과는 달리 품이 많이 드는 까닭이다. 다른 프로그램의 경우, 진행자는 대개 스튜디오 녹화 반나절이면 일이 끝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은 그렇지 않다. 거의 매주 있는 솔루션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현장을 찾아 촬영도 해야 하며, 촬영 마무리 뒤 녹음까지 하려면 일주일에 사나흘은 잡아먹는다. 게다가 희귀질환을 가진 아동이 산골에 살기라도 할라치면 일주일 내내 매달려야 한다.
그런데도 5년, 10년을 외치는 황 아나운서의 뜻은 무엇일까? 진지하고도 거창하게 말하면 ‘사명감’이고, 쉽게 얘기하면 “좋은 일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다. 2003년 2회 방송에 나왔던 현경이(당시 13살) 얘기를 꺼냈다.
“뮤코다당증을 앓던 현경이는 많이 우울해 하던 아이였는데 방송에 나온 뒤 밝은 모습으로 바뀌었어요. 학교 친구들과 사이도 좋아졌고, 부모님과의 관계도 좋아졌죠. 그러다가 1년도 채 안 돼 갑자기 숨졌어요. 새로 만들어진 치료제를 맞으러 가던 차 안에서 갑작스런 호흡곤란으로…. 그렇지만, 현경이의 행복한 1년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2년여의 ‘여행’은 “그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물꼬를 터주는 것”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희귀병에 투자하는 게 비효율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회적인 복지 시스템이 마련돼야 해요. 경제적 지원만으론 안되죠. 정신 상담과 자원봉사 등 다각적인 해법으로 문제를 풀어야죠. 예산문제 등 걸림돌이 많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장애인 복지시스템의 역할 모델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