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저씨다. 지하철에서 있는 대로 다리 쩍 벌리고 앉지 않고, 짧은 치마 입은 여자 훔쳐보다 발을 헛디딘 적 없고, 이빨에 이쑤시개 꽂고 식당 문을 나서지도 않지만, 그래도 아저씨인 건 사실이다. 내 친구들도 물론 아저씨다. 일찍 결혼한 녀석들은 애가 초등학교 들어간 지 오래고, 친구들 중 결혼 안 한 건 나 하나뿐이다.
아저씨도 인터넷을 알아야 하는 세상이다. 이메일 주소 하나쯤은 다들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아저씨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은 포르노사이트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 이상인 경우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나의 아저씨 친구들에게 내 존재는 특이하게 여겨지고 있다. 애들이나 하는 게임에 미쳐 취직도 안 하고 빌빌거리니 별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친구들 만나서 게임 얘기라도 할라치면 다들 모나리자의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게임은 애들 장난이 아니라 당당한 첨단산업으로 대우받고 있다. 내 친구들을 포함해 게임에 대한 아저씨들의 인식 역시 조금씩 바뀌었다. <스타크래프트> 정도야 한두번씩은 다들 해봤고, 이제는 게임얘길 하면 한두 마디씩 거들기도 한다. 그래도 게임의 산업적, 혹은 문화적 측면에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니라, 게임으로 노는 데 열을 올리는 건 나뿐이다.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다.
어느날 중학교 동창한테서 뜻밖의 전화 한통을 받았다. <디아블로2>의 확장팩이 도대체 언제쯤 나오냐는 문의였다. 게임에 대해선 관심이 전혀 없던 친구라서 꽤 의외였다. 더 놀라웠던 건, 그 친구 사무실에 놀러가서 만난 동료한테서도 <디아블로> 얘기를 잔뜩 듣고 왔다는 것이다. 한창 온 나라가 <스타크래프트> 열풍이던 때도 잠깐 해보고 곧 흥미를 잃었던 친구들이다. 도대체 <디아블로>의 어떤 점이 30대 중후반 아저씨들을 사로잡은 것일까?
<디아블로>는 초보자가 덤비기 좋은 게임이다. 롤 플레잉 게임답지 않게 대화가 중요하지 않아서 영어 한자 몰라도 얼마든지 진행이 가능하다. 따지고 들자면야 스킬 트리니 아이템 시스템이니 복잡한 것도 많지만 일단 마우스로 찍기만 하면 적을 공격할 수 있으니, 무작정 해도 안 될 게 없다. <스타크래프트>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중 비교적 단순한 편이지만 생산과 전투를 병행해야 하는 것을 비롯해 <디아블로>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비정한 듯한 분위기에 어두운 화면 역시 밝고 귀여운 게임보다는 아저씨들이 참여하기에 덜 부담스럽다.
네트워크 플레이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2편에서는 아저씨들의 참여가 더욱 늘었다. 내 친구를 비롯해 다들 싱글 플레이보다는 멀티 플레이에 주력하는 모양이다. 특히 힘을 합쳐 디아블로를 잡으러 가기보다는 다른 플레이어와의 대결, 이른바 PK가 인기다.
아저씨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술마시는 거말고는 별달리 풀 방법을 모른다. <디아블로>는 큰돈 안 들이고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소일거리다. 게다가 게임 플레이의 논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익혀온 것들과 다를 게 없다. 적자 생존의 논리, 힘있는 게 곧 정의인 게 PK의 세계다. 더 중요한 건 노력보다는 출생이나 운 같은 게 더 중요한 현실 사회와는 달리, 조금만 고생해서 레벨만 높여놓으면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저씨들은 먹은 나이만큼 권력을 갈망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공연히 집안 식구들에게나 군림하려 든다. <디아블로>는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멋진 신세계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