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은 왜 ‘위기’에 빠졌을까? 흔하게는 드라마의 실패를 든다. 전반적 광고 수주를 좌우하는 드라마에서 <대장금> 이후 이렇다할 흥행작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락프로와 뉴스의 침체도 단단히 거들었을 것으로 본다.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이 모두를 아우른다. 문화방송이 본래 채널 이미지를 잃고 우왕좌왕하면서 시청자의 눈길잡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문화방송은 젊고 진보적인 시각, 나이로는 이른바 ‘386세대’에 가장 가까운 채널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뉴스와 시사물에선 진보적인 시각이 특히 강점으로 지적됐고, 드라마 또한 단순히 ‘재미’의 차원을 넘어 사회성을 담거나 적어도 드라마 문법의 변화를 선도하는 새로운 시도들로 호응을 받아왔다. <네멋대로 해라>와 <다모> <대장금> 등 문화방송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드라마들이 모두 시청률 이상의 채널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던 사례다. 그런데 이게 대대적으로 흔들렸다는 거다.
이른바 ‘개혁 프로그램’을 앞세운 한국방송의 진보적 의제 선점에 밀린 점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건 역시 내부 요인이었다. 전임 이긍희 사장 체제의 보수성이 문화방송의 정체성을 약화했다는 데 문화방송 다수 구성원들이 동의한 바 있다. 뉴스는 보수화 논란에 휩싸였고, 드라마 또한 단기적 시청률 경쟁을 위해 기획이 수시로 흔들렸다. ‘공화국’ 시리즈로 정치드라마의 본령을 열었던 문화방송답지 않게 <영웅시대>는 다큐적 소재와 무용담식 극화 방식이 끊임없이 부딪치며 채널 이미지 혼란을 한층 부추겼다.
지난 23일 문화방송의 봄 개편이 단행됐다. 최문순 사장 취임 이래 첫 그림이다. 개편 하룻만인 24일 밤 시간대 편성표를 이어놓으니 이렇게 된다. <떨리는 가슴>(저녁 7시25분)으로 <제5공화국>(밤 9시40분)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밤 11시30분). 각각의 프로그램 사이에는 <뉴스데스크>(밤 9시)와 <시사매거진 2580>(10시40분)이 방영됐다.
일단 문화방송이 이긍희 체제의 ‘과도기적’ 혼란을 딪고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가는 여정에 성공적으로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이날 밤 시간대만 보면 그렇다. <떨리는 가슴>은 사랑과 가족에 대해 기존 드라마와는 다른 작법과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트랜스젠더와 이혼녀 등 소재의 화제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품격을 부여한다. 24일엔 새로 찾아온 사랑의 감정과 가족 사이에 선 40대 가장의 애틋한 떨림을 화면에 담았다. 극적 재미 속에 사회적 의미에 대한 성찰을 함께 품은 문화방송 드라마의 특장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제5공화국>은 한국 현대사의 중대한 분기점을 이룬 10·26을 속도감 있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재판기록 등 자료와 사실에 근거한 구성과 해설을 동원한 다큐멘터리 기법이 눈길을 잡는다. 재벌과 특정 정치인 미화 논란을 불렀던 <영웅시대>와 달리, 다큐성에 충실하다. 그러면서도 역사를 ‘민주화의 진전’으로 바라보는 시각 또한 견지한다. 뒤이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한국의 진보’ 3부작의 첫편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을 통해 80년대 노동운동의 재평가를 시도했다. 문화방송의 제 색깔 찾기 움직임 앞에서, 이제 다른 채널들이 바짝 긴장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