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인>의 세계적 성공 이후 데시가하라 히로시는 또 한번 작곡가 다케미쓰 도루와 함께 아베 코보 원작을 토대로 세 번째 장편 <타인의 얼굴>을 연출한다. 주인공 오쿠야마는 사고로 얼굴 화상을 입고 타인의 얼굴틀로 만든 마스크를 쓰게 된 뒤 아내를 유혹하고 행인을 추행하는 등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영화는 두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딴 얼굴의 사나이’ 오쿠야마의 이야기와 함께 원폭으로 얼굴 화상을 입은 소녀와 그녀 오빠간의 근친상간적 사랑이 병행적으로 보여진다. 구로사와의 영화를 통해 낯이 익은 나카다이 다쓰야가 오쿠야마 역을 맡았고 구로사와, 오즈 야스지로 그리고 미조구치 겐지의 대표작에 출연했던 교 마치코가 오쿠야마의 아내 역으로 등장하여 상반신 누드를 보이는 열연을 펼친다. <타인의 얼굴>로부터 14년 뒤 나카다이는 비슷한 배역을 구로사와 아키라의 세 번째 컬러영화 <카게무샤>에서 또 한번 맡게 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카게무샤>의 주인공 역으로는 <자토이치> 시리즈의 가쓰 신타로가 사전 낙점되었으나 촬영도중 감독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나카다이로 교체되었다.
<카게무샤>는 국내서도 2년 전 DVD로 발매된 바 있으나 최근 발매된 크라테리언 DVD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국내 버전보다 20분이 늘어난 3시간의 일본 개봉 버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국내 버전과는 달리 일부 장면의 편집순서가 바뀌었고 미후네 도시로와 함께 구로사와의 또 다른 페르소나인 시무라 다카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가 등장하여 <스타워즈>의 흥행이 어떻게 <카게무샤>를 있게 하였는지를 얘기하고, 화가였던 감독이 직접 그린 그림들로 <카게무샤>를 40분간 재구성한 영상, 제작비 충당을 위해 구로사와와 코폴라가 함께 등장하는 선토리 위스키 광고를 보여주는 등, DVD는 크라테리언다운 충실한 부록을 담고 있다.
<타인의 얼굴>에는 토니 레인즈의 코멘터리가, <카게무사>에는 토니 레인즈와 감독간의 인터뷰 등이 실린 두툼한 소책자가 또한 포함되었다. 광기가 과학과 만나는 지점에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타인의 얼굴>은 선배격인 <지킬과 하이드>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조르주 프랑쥐의 <얼굴없는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일본의 패전과도 관련있는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선택한 것은 죄의식으로 인한 자살이거나 아니면 조금씩 미쳐가는 것이었다. 작금의 일본을 보노라면 구로사와나 데시가하라와 같은 인생의 좋은 선배들을 두었어도 그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미쳐가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여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