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성이란 계산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과학은 자연의 운동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바꾼다. 근대과학에서 수학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비슷하게, 일상의 삶에서 근대화된다는 것은 삶이 예측가능하고 계산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 어딜 가면 무엇을 할 수 있고, 거기에 필요한 비용은 얼마나 들 것이고 등등.
어느 정도 조사하고 예측하기에 쓸데없이 허탕칠 일도 없고, 대개는 예약하고 하기에 힘들게 기다릴 일도 없다. 가격표대로 사고파니 흥정으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다. 나의 것과 너의 것이 분명해지고, 나의 일과 너의 일이 분명해지며, 나의 공간과 너의 공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무례하고 부당한 일로 간주된다. 내가 책임질 것과 네가 지불할 것이 정확히 계산되고, 내가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이 뚜렷해진다. 붐비는 지하철이나 거리에서도 각자가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 존중된다. 누군가에게 몸이 닿거나 너무 가까이 근접했다 싶으면 “미안하다”, “용서해라”라는 말을 남발한다. 그래서 일단 근대화된 삶은 편하다. 남들이 나를 침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의 문명화 과정을 연구했던 엘리아스는 바로 거기서 근대인 사이의 거리를 본다. 그 거리만큼 올라간 벽의 높이를 본다. 존중되는 나만의 영역, 그것은 그 거리를 사이에 두고 타인과 분리된 생활의 벽인 것이다. 그 벽은 함께하는 삶을, 무언가를 함께 나누는 삶을 절단하고 분리한다. 부딪친 것도 아닌데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몸이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도 미안해할 만큼 그들은 나에게 거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태는 이제 한국의 대학생들에게는 더욱더 리얼한 현실이 된 듯하다. 각자의 것, 각자의 영역을 정확하게 구별하고 분리하는 생활의 단적인 징표는 아마도 ‘더치 페이’일 것이다. 영국인이 네덜란드 인을 엿먹이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말은, 이제 우리의 ‘신세대’들에겐 새로운 관습이자 예절로 실행되고, 심지어 ‘덕목’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남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그런 만큼 자신도 역시 남들에 대해 부담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 그것은 내가 먹은 것은 내가 계산하고 내가 주문한 것은 내가 책임진다는, 나·너를 나누고 계산하는 근대적 합리성의 정확한 한 단면이다. 덕분에 이젠 ‘안심하고’ 비싼 식당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비싼 음식을 시켜먹게 되었다고들 한다. 내가 시킨 것만 책임지면 되기 때문이란다.
예전에 독일에서 유학하던 한 후배에게 들은 말이다. 그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둘이 앉아 먹을 때는 만지고 물고 빨고 하며 먹다가는, 계산할 때가 되면 각자가 먹은 것을 작은 단위 숫자까지 계산해서 더치 페이하는 것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만으로도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여러 사람이 모여 식사라도 하는 경우에는 먹은 음식값 계산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한다. 이는 독일만의 얘기는 아닐 거다. 일본까지 포함해서, 충분히 근대화된 나라들의 공통점이다. 이제 한국도 그 일상마저 충분히 근대화된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을 개인별로 분리했던 저 근대의 ‘거리’가 사람들 내부에 자리잡은 것이다. 시장이, 자본주의가 일상의 삶 자체를 사로잡은 것이다.
덧붙이면, 함께하는 식사란 원래 상이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장 흔한 방법이었다. 제사나 미사 뒤에 음식을 함께 나누어먹는 ‘음복’이란 음식을 나누면서 삶을 함께 나누고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삶을 함께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하지만 더치 페이하는 사람들에게 공동식사란, 옆에 앉아 먹으면서도 음식을 나눌 줄 모르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결국은 각자의 삶만을, 각자가 먹은 것만을 책임지는 분리의 장일 뿐이다. 덕분에 비싼 음식을 마음놓고 시켜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에선, 식사란 그저 먹는 것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그저 음식에만 집착하는 거대한 식탐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뒤룩뒤룩 불어난 추한 몸은 그런 식탐의 대가일 게다. 거기에선 분리된 삶의 편안함을 위해 치른 고립된 삶의 고독에서 느낄 수 있는 일말의 안쓰러움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추하고 비루해 보일 뿐이다. 더치 페이의 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