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리스크를 스탭들에게 전가하는가”
“눈 가리고 아옹하는 건 제일 싫다”는 영화인 신문고(filmunion.ivyro.net) 고병철 팀장의 직설적인 화법은 2001년 9월, 비둘기둥지 2기 시절과 변함이 없다. 아픈 아버지를 모시던 조명부가 있었다. 그는 병원비를 조금이라도 자기 손으로 보태고 싶었다. 체불된 70만원을 받기 위해 그는 제작사에 통사정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알았다, 알았다” 손만 내젓는 임금 체불자. 빈손으로 돌아온 그는 병원 앞에서 도저히 식구들 볼 면목이 없어서 밤새 소주를 들이켜며 울분을 삼켰다. 비토리오 데 시카 영화의 소재가 될 만한 이 스토리는 고 팀장의 실제 경험담이다. 2002년부터 조감독협회에서 영화인 신문고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그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처음으로 단체사업을 지원하는 올해 4년간 애정을 쏟은 이곳을 떠나 현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지점에서 하는 이야기라고 운을 뗐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지난 4월1일 기자회견에서 <여고생 시집가기>에 대해 매우 분개했다.
=<여고생 시집가기>는 회장의 재산, 부금 각각 반반씩 압류에 들어갔다. 그뒤 공증을 받고 약간 안심했는데, 정말 나쁜 사람들이더라. 공증을 해주기 전에 선담보를 영화 관련 업체들에 설정한 상황이었다. 스탭들만 불쌍하다. 영화 관련 업체건 다른 주체들은 온갖 조치를 다한다. 스탭들은 기다리라는 말만 믿은 죄밖에 없다. 김진홍 제작이사가 주도적으로 행한 일이다. 부금이 나올 날이 임박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쪽은 계속 도망만 다니고. <여고생 시집가기>는 체불에 대한 한국영화 최악의 사례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논리 때문에 늘 어려움이 많다고 들었다.
=사실 언론에 이런 사실을 공개하는 걸 지난해 9, 10월에 하자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6월 말 영화인 신문고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내세웠던 원칙은 실명공개였다. 타협과 화합으로 가자는 분위기가 나오면서 그것이 유야무야되었다. 자신의 의지로 싸워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면 언제든 원상태로 복귀된다. 명백한 사실인 내용들도 공개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 한국영화조수연대회의가 좀더 용기를 갖고 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역량이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영화인 신문고를 운영하고 한국영화조수연대회의에 참가하며 느끼는 감정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그 사람들 대부분 한참을 기다렸다가 올리는 거다. 참다참다 겨우 올리는데 그걸 운영조직에서 공개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 과도기적인 양상이 있지만 앞으로는 원칙을 갖고 해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영화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노동법 문제가 단기간에 바뀔 것이라 보지 않는다. 일단 인식의 전환이 우선이다. 임금 체불로 전화를 걸면 제작자들은 투자자가 변심을 했다는 이야기를 백이면 백 다한다. 1억, 2억원 비니까 스탭 잔금은 줄 수 있으나 후반작업을 못하고 개봉을 못한다, 이런 식으로 스탭들을 딜레마에 빠뜨린다. 그것을 일종의 면죄부로 활용한다. 하지만 왜 리스크의 책임을 스탭들에게 전가하는가. 투자환경의 불합리함을 연봉 600만원짜리 스탭들이 왜 대신 싸워 얻어내야 하는가. 한국영화 제작 전반의 불안정서의 문제는 왜 툭하면 스탭들에게만 전가되나.
-그런 경우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므로 언제나 민사소송으로 응해야 할 텐데.
=소액 민사소송이 보통 50만∼100만원이다. 일례로 가을엔터테인먼트 추상욱 대표는 계좌번호를 세번인가 보냈는데 문자를 매번 못 받았다는 거다. 이게 소송으로 해결되는 데 8개월이 걸렸다. 1년 만에 65만원 변제했다. 임금 체불의 이유도 어이가 없다. “내가 알아서 줄 텐데 영화인 신문고에 올려 시끄럽게 구냐, 괘씸해서 못 주겠다”였다. 우리가 전화를 걸면 일주일 뒤에 준다고 하고 곧바로 해결한 회사는 단 한건도 없다. 정말 단 한건도 없었다. 시간을 끌면, 결국 우리가 공증을 써달라고 한다. 절대 안 써주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 그럼 소송이다.
-왜 지금 영화인 신문고를 떠나는가.
=용기를 더 내야 한다는 방향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한국영화조수연대회 내에는 없을 것이다. 내가 영화하는 그날까지 지켜볼 문제이고,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돕겠다. 그러나 지금 내가 여기 남아 있으면 부딪칠 수밖에 없다. 실무진을 새로 꾸려서 예산이 나오고 월급을 줄 수 있으니까. 나는 외부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운영조직과 현장의 내부고발자 역할을 하겠다. 영화인 신문고 사례를 보면 답은 이미 대부분 나와 있다. 사례별로 문제점이 명확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를 영화계 전체에 공개적으로 던져주면 함께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이동직 법무법인 한결 변호사 인터뷰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스탭들의 사례를 보면 근로기준법에 적용받지 못하는 점이 악용된다.
=영화사 직원들은 당연히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다. 스탭은 법리적으로 영화제작사 소속이 아니라 계약에 의해 들어오는 사람이다. 따라서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보기가 쉽지 않다. 임금 근로자이지만 근로기준법의 법적용을 받으려면 구체적인 지위, 감독 관계의 유무를 기준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법으로는 일반적인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 하나 판례의 변화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골프장 캐디 같은 경우 유사한 상황이었지만 사회적 공감대의 형성을 통해 인정받은 경우다.
-근로기준법, 노동법의 보호가 없다면 임금체불이나 스탭처우 문제의 개선은 어려운가.
=그건 아니다.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못 받더라도 법적 보호는 별도로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영화가 끝났는데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분명 계약 위반이기 때문에 손해배상은 당연하다. 약정된 보너스나 급여를 안 준다면 당연히 받을 수 있다. 소송을 근거로 영화사가 투자사에 받을 돈이나 집기를 압류하는 것도 채권자 입장에서 당연한 행동이다.
-제작자들은 잔금 미지급시 투자자들을 이유로 삼고, 영화 완성을 면죄부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건 영화작업의 특성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빌린 돈을 안 주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급여 100만원을 못 받는 것은 남에게 100만원을 빌려준 것과 똑같다. 간단하다.
-계약이 언제나 문제다. 법률적인 충고를 해준다면.
=계약 자체의 유불리를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작은 방법이라면 공정거래위원회나 이런 곳에서 약관의 규제를 통해 임대차 보호법의 경우처럼 영화사와 스탭들의 계약을 약관이나 규제 대상으로 강제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의 전제는 스탭과 스탭단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관계당국 입장에서는 그 사안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나의 제작사와 한명의 스탭이 다투어서는 스탭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