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Enjoy TV > TV 가이드
찾고싶다, 절망의 돌파구를
2001-07-12

방황하는 십대의 정서를 담은 ‘나’ 광고

제작연도 2001년 제품명 나(Na) 광고주 KTF 대행사 웰콤 제작사 매스메스에이지(감독 박명천)

황량한 바람이 불고 있는 인적없는 어느 곳. 저 멀리 철탑의 중턱에 한 소년이 앉아 있다. 길 잃은 한 마리 새처럼 정처없고 외로워 보인다. 카메라가 그 소년의 얼굴을 비춘다. 상념에 잠겨 있는 소년. 그의 눈은 무슨 일인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위태로운 표정과 달리 꾹 다문 입술을 타고 평화로운 허밍이 흘러나온다. 이어지는 소년의 독백. ‘나는 학교에 간다. 학교에 가고 싶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 무엇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레이션에 이어 급기야 소년은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손에서 은색의 스프레이통이 힘없이 벗어나 바닥을 구른다. (중략)

‘나’의 얘기가 달라졌다. 지난해 소비자를 향한 ‘나’의 말걸기는 ‘아버지 나 누구예요?’란 일자머리 총각의 난데없는 질문으로 포문을 열었다. 이어 그룹 god가 촌티나는 동네 한량,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설픈 외계인 등으로 분장해 ‘공짜가 좋다’며 허허실실 웃음을 실어날랐다. 촌티, 엽기, 복고란 유행의 삼요소를 총망라한 ‘나’ 광고의 여파는 광고 밖으로 뻗어나갔으며 ‘나’는 TTL과 더불어 1823세대의 대표적인 이동통신브랜드로 자리를 다졌다.

한동안 공백기를 갖더니 ‘나’가 새로운 테마로 단장해 나타났다. 그 사이 선발브랜드인 TTL은 한 차례 변화를 겪었다. 신비소녀 임은경은 베일을 벗은 뒤 우물 밖을 뛰쳐나갔고, 임은경의 후임으로 이름모를 소년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1823세대에 의해 만들어지는 희망에 찬 TTL공화국을 기치로 TTL은 아성 다지기, 혹은 넓히기에 주력하고 있다.

전략상 TTL을 의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나’는 휴식기 동안 경쟁자의 발걸음을 예의주시했을 것이다. 그 결과, ‘아직 희망을 말하기에는 이르다’며 TTL의 슬로건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1823세대를, 방향성을 상실한 어두운 세대로 인식했다. 학교에 가고 싶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 또 무엇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그들의 고민에 눈을 돌렸다. 방황하는 십대란 진부할 수도 있는 테마. 그런데 이번 ‘나’의 얘기엔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게끔 유도하는 힘이 있다. 독창적인 화법으로 새삼스러운 주의와 환기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분명 박명천 감독의 공이 엿보인다.

초기 TTL 광고에서 스무살을 아이도 어른도 아닌 미완의 세대로 규정해 성장을 갈망하는 그들의 심리를 독특한 이미지로 체현한 바 있는 그는 다시 한번 특유의 장기를 발휘했다. 즉각적인 감성의 파문을 낳으면서도 그 동인(動因)의 실체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달게 만드는 ‘안개 전법’을 이번에도 사용하고 있다. 그의 광고는 단순하고 쉬우며 새로운 게 좋은 것이란 우수광고의 일반론을 배신한다. 그렇다고 잰 체하는 어려움은 아니다. 이미지의 실타래를 버겁지 않을 만큼 안겨주며 광고의 잔상을 곱씹게끔 만든다.

이번 ‘나’ 광고에서 창백한 소년은 학교에 가지 않은 채 이른바 땡땡이를 치고 있는 것 같다. 마른 눈물, 절박함의 역설적 표현 같은 맥없는 허밍, 갈팡질팡하는 내레이션 등이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그의 불편한 심정을 암시한다. 후반부에 등장한 은색통의 이미지가 의미심장하다. 제작진은 은색통의 정체가 ‘나’라는 브랜드를 새겨넣기 위한 스프레이통에 불과하다고 설명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물체의 이미지는 환각의 도구를 통해 돌파구를 찾고 싶다는 절망의 정조를 풍기며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나’의 얘기는 우울함만으로 얼룩져 있진 않다. 마지막에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세상이 나를 속일지라도’ ‘나’를 통해 ‘세상을 다 가져라’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소년의 막막한 내면에 젖어들다보면 너무 성급한 명암의 전환이란 인상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대목에서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눈물흘리며 환하게 미소짓는 소년의 모순된 표정은 설득력없는 상업적 메시지를 위해 문제를 봉인했다는 허탈함을 주진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 뒷맛이 찜찜한 것은 이 광고가 유발한 호감이 단순히 피상적 스타일의 힘에서 비롯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 이동통신브랜드 ‘나’는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에 힘겨워하는 나(소비자)의 대변인을 자처했지만 광고에서 형상화된 나 세대의 모습은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실제 그들에 대한 반영이라고 보기엔 다소 멋스럽게 포장된 측면이 있다.

광고가 미학적 가치를 간과해서는 곤란할 터이다. 그러나 영상이 예쁘네라든지, 저 모델 누구인지 참 잘 골랐네라는 정도에서 소비자의 호기심이 머무른다면 이 광고가 던진 10대의 고민거리는 진정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지점에 다가가지 못한 것일지 모른다.

참고로 ‘나’ 광고는 올해 ‘세상은 나를 속일지라도’라는 주제 아래 취업난, 가정문제 같은 사회문제를 시리즈로 다룰 예정이다.

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