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겨울이었다. 두 번째 학력고사를 앞두고 대학 입학원서 쓰기 위해 모교에 갔다. 지각했다며 개학 첫날부터 죽장을 휘둘렀던 담임은 없었다. 그는 서울의 한 대형 학원에 스카우트되어 떠났다고 했다. 대신 머리숱 별로 없는 영어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테니스로 울룩불룩 키운 기형적인 오른팔을 휘두르며 그가 말했다. “야! 과 바꿔라. 니가 세상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구나.” 영어 선생은 경제학과나 경영학과를 가야 평생 돈 만지며 산다고 했다. “졸업한 뒤에 은행원 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은데.” 쉰이 넘은 삶을 설득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었다. 지망학과 난에 경제학과라고 적었다. 북적이는 지원학교 입학접수 창구 앞에서 내 도장 찍고 과를 바꿨다.
입사 직후 본의 아니게 빚쟁이가 되면서 은행원이 될걸 싶었다. 대출 인생이 어디 나 혼자일까마는, 사회초년병에겐 기천만원이 버거웠다. 뭣보다 은행에 불려다니는 게 싫었다. 기한을 연장하기 위해 대출 창구 앞에서 서성일 때는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았다. 그때 은행원들은 하나같이 으스대는 간수처럼 보였다. 2년 전이었나. 공덕동 로터리에 있는 K은행에 갔을 때였다. 하필 대출 담당 직원이 대학 선배였다. 우연한 만남은 짧았지만 고통스러웠다. “웬 카드를 이렇게 많이 쓰냐?” “뭐, 살다보니….” “기자니까 연봉이 3500만원쯤 되겠네.” “에이, 농담도 잘하시네.” 그는 반가움의 표시로 공연한 관심을 휘둘렀고, 그래서 난 아팠다. 그날 이후 그 지점과 거래를 끊었다.
남들에겐 생명줄일, 돈줄 쥐고 흔드는 은행 간수들의 횡포를 견디며 버티길 6년째. 밟히면 강해지는 것인가. 이젠 돈이 급한 후배들이 대출문제로 곤란을 겪을 때 자연스레 상담을 자청할 정도가 됐다. 사장에게 후생복지 강화 차원에서라도 회사가 나서서 직원들의 대출 보증을 서야 한다고 서슴없이 직언도 한다. 편집장의 에디토리얼에 오르는 영광도 얻었다. “<마이 제너레이션>에서 카드빚에 시달리는 젊은 남녀를 보다가 문득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씨네21> 기자라는 번듯한 직업을 갖고도 카드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월말만 되면 카드 돌리는 데 하루를 소요했고 또 한 사람은 대출하게 도와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경험만큼 좋은 무기는 없다. 지난주 H은행 K지점에서 전화가 왔다. 새로 전근온 것이 분명한 은행원은 대출금 중 3백만원을 상환하라고 위압적으로 선고했다. 연체 횟수가 많다는 게 이유였다. 3개월 전에 대출금 일부를 상환하고 새로 연장 계약을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졌더니, 그때 계약은 3개월짜리 한시계약이라고 했다. 내게 계약서를 내민 직원을 바꿔달라고 했더니 회사를 그만뒀다고 했다. 5년 전이었다면 3백만원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은행에 가서 어떤 고지도 없이 5일 안에 3백만원을 가지고 오라는 건 말도 안 되는 횡포라고 윽박질렀다. 며칠 뒤, 찾아간 은행에서 난 결국 사과를 받아냈고, 상환 기한을 6개월 뒤로 미루는 쾌거를 거뒀다.
나, 대출 인생이요, 라고 커밍아웃하면서 은행원에 대한 과다한 증오와 같잖은 무용담을 늘어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독자들 중에서도 은행 가서 대출 때문에 기죽는 분들 많을 것이다. 빚 없이는 살기 어려운 세상, 마인드를 바꾸시길 권한다. 당신은 은행의 대출상품을 구입한 엄연한 소비자요, 사채와 맞먹는 은행의 고이율을 부담하는 고객이다.
*이 글로 인해 은행이 나의 신용등급을 조정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