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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을 뚫고 호쾌한 액션을!
2001-07-11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26 유열(1934∼89)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행방이 묘연해진 금괴가 있다. 그 금괴를 둘러싼 미스터리와 퍼즐맞추기는 기본이다. 각국의 고수들이 총집결하여 한바탕 총격전과 격투기의 퍼레이드를 벌이고 나면 승리자는 으레 한국의 터프가이들이다. 자, 이 금괴를 이제 어떻게 한담? 결론은 의외로 감동적(!)이다.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 군자금으로 헌납한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에 걸쳐 이상범람현상을 보인 이른바 ‘만주물’(滿洲物)의 키워드는 그래서 언제나 금괴와 액션 그리고 독립군이다. <한국영화 100년>의 저자 호현찬은 이 장르에 대해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무국적영화”이긴 하지만 당대 관객의 “액션영화에 대한 갈증”을 풀어준 순기능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긴 금기와 검열로 얼룩진 박정희 군부독재하에서 무언가 그럴싸한 명분을 가진 호쾌한 액션영화를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겠다 싶기도 하다.

만주물의 키워드들은 유열 필모그래피의 단골손님들이다. 최초의 물꼬를 튼 의 경우 무대가 홍콩이긴 하지만 탈취한 금괴의 향방은 역시 만주의 독립군이다.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박노식과 허장강이 주연한 <태양은 늙지 않는다>는 그 배경이 만주다. 청산리전투에서 모티브를 따온 광활한 스케일의 전쟁장면들 사이사이로 일본군에 부모를 잃은 한국인 청년과 일본군 사령관의 딸이 펼치는 로미오와 줄리엣식의 사랑이야기가 처절하게 펼쳐진다. <악인의 계곡>은 마카로니 웨스턴을 방불케한다. 돈냄새를 맡고 몰려든 7인의 악인들이 혈투를 벌이는데 최후의 승자는 역시 독립군에 그 돈을 헌납하고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길을 떠난다. <대평원아>에서 금괴는 불상 속에 숨겨져 있다. 부랑아를 가장한 한국의 독립투사는 일본의 군인과 낭인들을 모두 죽이고 결국 금괴가 든 불상을 손아귀에 넣는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해도 ‘숨겨진 금괴’라는 매혹적인 맥거핀은 여전히 유효하다. <황금독수리>에서는 일본군 패잔병에 맞서 금괴를 되찾고, <무정의 네온가>에서는 남파된 간첩이 금괴를 찾아 남한에 귀순한다.

유열은 고려대 영문학과에서 수학하다가 <한국일보>와 <민국일보>의 사진부 기자를 거쳐 충무로에 입문한 특이한 경력의 작가다. 시나리오 데뷔작인 <갈매기 우는 항구>는 마도로스들의 사랑과 복수를 그린 액션멜로. 그가 가장 선호하는 배우였던 박노식과 허장강 그리고 이대엽과의 인연이 시작된 영화이기도 하다. 이후 그는 55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편에 육박하는 시나리오들을 스크린에 올렸는데, 만주물을 위시한 액션영화 이외에도 다양한 장르들을 두루 섭렵했다.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나운규의 일생>은 최무룡이 감독과 주연을 겸했는데 국내의 많은 상들을 수상한 당대의 수작이다. 멜로영화의 대표작은 그 주제가가 아직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 한국전쟁 때문에 운명이 엇갈린 비련의 주인공들이 등장해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든 작품인데 남궁원과 윤정희가 공연했다. 괴기물인 <여랑> <천년백랑>이나 미스터리물인 <종야> 등에도 손을 댄 것을 보면 다양한 장르영화에 대한 천착이 남달랐던 것 같다.

유열은 동시대 작가들이 대개 그러하듯 방송작가로서의 작업도 병행했는데 라디오드라마로는 <망향30년>, TV드라마로는 가 유명하다. 특히 는 유열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액션과 첩보의 컨벤션들을 마음껏 구사하여 MBC에서 장기간 방영된 인기프로로 폭넓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말년의 작품인 <깊고 깊은 그곳에>는 형사가 등장하는 수사물(디텍티브 스토리)의 틀 안에 비극적인 멜로를 담아낸 특이한 장르의 영화다. 영악한 전과자로 등장한 안성기와 연민이 많은 형사로 등장한 김무생의 연기가 좋다. 유작인 <스잔나의 체험>은 대만을 배경으로 컴퓨터칩 쟁탈전을 벌이는 첩보멜로. 금괴 대신 컴퓨터칩이 등장한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4년 조정호의 <갈매기 우는 항구>

1965년 김수용의 <상속자>

1966년 최무룡의 <나운규의 일생> ★

1967년 고영남의

1969년 고영남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1970년 고영남의 <태양은 늙지 않는다> ★

1971년 김시현의 <무정의 네온가>

1972년 임권택의 <돌아온 자와 떠나야할 자>

1973년 김묵의 <악인의 계곡>, 김시현의 <대평원아>

1974년 김시현의 <방랑의 영웅>

1976년 강대진의 <유정>

1977년 이원세의 <악어의 공포>

1979년 남기남의 <폭풍을 잡은 사나이>

1983년 김기의 <약속한 여자>

1984년 설태호의 <깊고 깊은 그곳에> ⓥ

1986년 설태호의 <스잔나의 체험>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