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배우 흉내내며 서구의 모더니티 전파
내가 맡은 역은 장충단 공원에 놀러갔다가 거기서 뭐 사먹구, 배아프다고 뒹굴구 울구 그러는 거야. 부모가 무당 불러다 굿을 하는데 내가 펄펄 뛰다가 죽어뻐렸단 말이야. 그러니깐 결국, 뭐 나쁜 걸 먹으면 배를 앓고, 코레라 같은 병이 생긴다, 그럴 땐 굿 같은 거 하지 말고, 약을 멕이고, 방역 주사를 맞고, 그래라. 그런 영화야.
그 영화 찍고 내가 첨으로 돈을 2원 받았다구.(“조선영화주식회사 입사, 이게 1924년이죠?”- 대담 중의 이영일) 조선키네마야! 조선배우학교(1925년 설립- 필자) 들어가기 전인데, 열아홉살 땐가 스무살 땐가 그래. 촬영은 이필우 아니면 이명우였겠지 뭐.(지금까지 복혜숙의 데뷔작은 조선키네마사 창립작품인 <농중조>(1926년)로 알려졌으나, 이 증언에 따르면 1924년경 미신타파와 보건방역을 주제로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제목과 감독 등은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여타의 문헌상으로도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시기적으로 일본인이 운영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제작된 영화인 듯하다.- 필자)
고 즈음에 내가 다방 ‘비너스’를 했다고. 스물세살 때부터 서른살까지 8년 동안을. 한 일년은 가오마담(일명 얼굴마담- 필자)으로 있었지. 돈이 없으니깐. 그 담에 인수받고. 아주 우스운 게, 내가 무슨 뽀기(복싱?- 필자) 선수하고 연애를 한다고 소문이 났어. 그때 사실은 경성촬영소 앞에서 <지손의 구락부>라고, 상영도 못한 영화를 찍었는데, 그게 뽀기 펀치에 죽은 사람 복수하는 얘기거든. 그러니까 글쎄 다방 하면서 뽀기랑 연애한다고 어디 났대나 뭐래나.
비너스 다방에는 안 오는 사람들이 없었어. 나중에 자유당 하게 되는 사람들도 많이 왔지. 윤보선씨하고 서항석(초대 국립극장장- 필자)씨, 조택원(무용가- 필자)이도 자주 왔다구. 윤보선씨는 아주 영국 신사 같은 양반이었지. 와서 땐쓰 하고 뭐. 근데 땐쓰 한다고 나만 잡혀 들어갔지.(<삼천리> 1937년 1월호에는 복혜숙을 비롯한 대중문화의 중심인물들이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서울에 딴쓰홀을 허하라’라는 탄원서의 전문이 게재되었다. 식민적 모더니티의 정황을 엿보게 하는 흥미로운 문건이다.- 필자) 내가 처음 잡혀들어간 건 그릇 때문인데, 다방 인수받아서는 안성에서 그릇을 맞췄거든. 근데 거기에 태극 팔궤가 그려져 있다구 잡아가더라구.
“그때도 고속촬영을 했어”그러고 있다가 <가고노도리>(<농중조>(籠中鳥))의 일본식 발음- 필자)를 1926년 조선키네마사에서 찍었지. 윤백남씨가 순한국사람 손으로 영화 만들겠다고 선포를 하고 만든 게 조선키네마사야.(‘윤백남프로덕션’에 대한 기억 착오. 이외에도 감독과 각본, 주연 등에 대한 회고 역시 현재 남아 있는 기록들과 다소 차이가 있다. 복혜숙은 대체로 사건의 흐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하나,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기억이 불분명한 편이다.- 필자)
나운규는 연기하는 게 아주 광적이지. 광기가 있어야 연기 해먹는다구. 나두 광기지 뭐유? 그때는 미국 활동사진 흉내내느라고, 눈에다 액체를 크게 해서(검게 칠한 아이라인을 말하는 듯- 필자) 다들 깜짝깜짝 놀랬대.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서양 년하고 뭐 다르지 않더구만” 이러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내가 남 흉내내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지.
<농중조>는 여학생으로서 자유연애 하는 얘기야. 원래 무대에서 했던 건데(토월회에서 공연- 필자) 그때는 주인공이 기생이었다구. 참 욕도 많이 먹었지만 여학생 남학생들한테는 아주 환영받았다구. 러브신을 찍는데. 장충동 가서 로케를 하니깐드루 사람들이 보지 뭐. 의자에 앉아서 손잡는 거 하고, 큰 나무 붙들고 이렇게 도는 거 하고. 그래도 그 나무 잡고 도는 거 찍을 때는 고속촬영을 썼다고, 일본놈들이.(<농중조>의 촬영은 가토오 교헤이(加藤恭平)가 맡았다.- 필자) 그렇게 찍고 있으면 구경하던 사람들이 “아이구 저것들 봐라, 저것들. 사람 보는 데서 막 그냥 손을 쥐고 지랄이구나.” 손을 뒤로 빼는 장면 찍으면 “그래도 감출 줄은 알어” 이래 가면서. 아휴, 참 남부끄러운 일들이 많았어.
<낙화유수>도 길에서 찍는데. 내가 천사 노릇을 하느라고 꼼짝도 못하고 섰으니까, 어떤 놈은 길 가다 와서 “아휴, 고거 이쁘게 생겼다” 그러면서 뺨을 꾀집고, 어떤 녀석은 치말 다 뒤집어보구. 그래서 내가 울고 그냥 야단을 하고 그랬지.
<홍련비련>은 주인공이 여배우야. 27년이지 아마. 이게 낮에 와서 촬영해다가 밤에 현상하구. 그래서 일주일에 다 된 영화라구. 그 기록이 있다구. 아무리 무성영화래지만 말이야 일주일에! 이명우가 이게 일주일 만에 다 될 거라구 그랬다구.(<홍련비련>은 이명우의 형인 이필우가 감독과 촬영을 맡은 작품이다.- 필자)
영화평론 모임에 떡국을 대주다 경찰에 연행그 담이 찬영회 사건이지?(찬영회(讚映會)는 건전한 영화평론을 통해 한국영화를 보호하고 회원간의 교류를 증진한다는 취지로 1929년 설립된 단체다. 그러나 1931년 1월1일 신년 하례 모임을 하던 나운규, 윤봉춘, 서월영, 복혜숙 등이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난입해 소동을 피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직후 찬영회는 해산되었다.- 필자) 그때 내가 혼났다구.
그때는 참, 이름은 있어도 돈을 벌려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지. 그때는 한창 과도기가 돼서, 남자들은 유학을 다녀와서 이런저런 일들을 했지만, 여자들은 일본 유학 하고 와도 아주 참 거시기 하지. 근데 일본사람한테 무슨 얘기할 게 있다 이러면 날 불러서 해. 그래서 통역 노릇도 많이 했어. 그치만 광산 같은 사업에 대한 통역 노릇은 또 어렵잖우? 그래도 난 또 척척 해주지. 그러니깐드루 사람들이 “아주 그러지 말구 짬이 있을 적에는 기생 노릇을 해라” 그러더라구. 그래서 기생 노릇을 하다가, 찬영회사건 때는 떡국대회를 하는데 돈들이 있나 이 사람들이? 내가 “에유, 내가 시간 번 거 가지구 가서 돈 내주면 되는데” 그랬지. 그때 뭐 떡국이 한 그릇에 십전두 채 못 했어. 그런데 그때 기생이 한 시간에 일원이십전 받았다구. 인제 쪼금 보태서 그렇게 낸 건데, 나를 잡아다 놓구 “니가 기생질해 벌어 가지구 그 뒷돈 대느라 그러느냐”, 뭐 별 소릴 다 하드만. 그래서 내가 “나는 기생이 아니라 여배운데 돈이 없어서 벌러 나왔다. 그리고 내가 일본말을 다른 사람보다 잘하니까 통역을 할라구 기생을 했다”구 그랬지.
한번은 ‘105인 사건’ 변호하는 거 때문에 김봉문(105인 사건의 주동자- 필자)씨랑 이인(변호사- 필자)씨랑 일본 손님이랑 몇이 내가 일하는 데 왔더라구, 그래서 내가 손님 대접을 하는데 김봉문씨가 “호! 그년. 난 일본 년인 줄 알았더니 조선 년이로구나!” 뭐 이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당신이 일본 손님 대접은 날더러 맡아서 하라 그러지 않았느냐, 또 그 일본사람이 우리 한국사람을 위해서 변론해 주러 왔대니깐 난 기쁜 마음에 열심히 얘기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그리구 그 담부텀 일본말 안 한다 그랬어. 난 절대루 안 한다구. 그러구 증말, 안 하리라는 결심을 하니깐 말이야, 딱 입을 안 떼니깐드루, 일본말이 정말 안 됩디다.
그 담 <세 동무>는 이구영씨가 감독을 했을 거야.(<세 동무>의 감독은 김영환- 필자) 그 주제가가 아주 유명했다구. <장수만세> TV서 첨 했을 때야. 내가 께스트(게스트- 필자)로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나와서 <세 동무>를 부르더라고. 사회자가 “<세 동무>에 주연한 여배우가 누군지 아세요?” 그러니깐드루 몰른대. 그 노래만 좋아서 배왔대.
그 담엔 또 <지나 가의 비밀> 할 적엔 참 기가 맥힌 에피소드가 많아. 내용은 내가 조선서 유괴당해 가는 거야. 그때 이월화(<월하의 맹서>로 데뷔한 여배우- 필자)하고 할 땐데, 이월화가 나하구 할 때는 지가 밤낮 악녀만 하니까 싫대요 또. (웃음) 암튼 그걸 촬영하러 중국에 들어가는데 촬영기 공탁금을 물고 가래. 안 그러면 촬영기를 놓고 가래나? 그래서 촬영비용 백오십만원을 내고 들어갔다구. 들어가서는 감독(유장안- 필자) 일본 여편네 팔아서 영화 찍고.
그 담이 <수업료>인데, 여기서 내가 서른두살에 할머니를 했다구. 그 담부터는 입 때까지 계속 할머니 역이야. 최인규가 감독을 했지. 최인규는 재주가 너무 많았어. 재승박덕이란 말이 꼭 옳아. 성미가 아주 지랄이야. 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여배우고 뭐고 없이 따구를 때려서 얼굴을 이렇게 붓게 하고. 그러고는 나한테 “데리고 나가서 찬물 찜질 좀 해주슈.” 으이구, 내가 그것 때문에 속썩은 생각하면. 그래도 재주는 아주 무섭지.
맨 끄트머리에 <순정해협>인가? <순정해협>은 비행기가 자꾸 와서 자꾸 폭격을 할 적에 불을 모두 끄고 앉아서, “이러다 죽으면 뭐 순직했다 그럴래나?” 이래 가면서 숨어 있는 영화야. 신경균이 감독을 했었거든.(내용상으로는 신경균 감독이 1945년에 만든 어용영화 <감격의 일기>(感激の日記)로 추측됨. 1928년에 제작된 <순정은 신과 같다>와 제목을 헷갈린 듯.- 필자) 근데 불살라버렸대. 그대로 뒀어도 괜찮을 건데.
정리 최예정/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shoooong@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