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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에서 러브신 찍다 행인들의 비난을 사다
2001-07-11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2 - 복혜숙 중

외국 여배우 흉내내며 서구의 모더니티 전파

내가 맡은 역은 장충단 공원에 놀러갔다가 거기서 뭐 사먹구, 배아프다고 뒹굴구 울구 그러는 거야. 부모가 무당 불러다 굿을 하는데 내가 펄펄 뛰다가 죽어뻐렸단 말이야. 그러니깐 결국, 뭐 나쁜 걸 먹으면 배를 앓고, 코레라 같은 병이 생긴다, 그럴 땐 굿 같은 거 하지 말고, 약을 멕이고, 방역 주사를 맞고, 그래라. 그런 영화야.

그 영화 찍고 내가 첨으로 돈을 2원 받았다구.(“조선영화주식회사 입사, 이게 1924년이죠?”- 대담 중의 이영일) 조선키네마야! 조선배우학교(1925년 설립- 필자) 들어가기 전인데, 열아홉살 땐가 스무살 땐가 그래. 촬영은 이필우 아니면 이명우였겠지 뭐.(지금까지 복혜숙의 데뷔작은 조선키네마사 창립작품인 <농중조>(1926년)로 알려졌으나, 이 증언에 따르면 1924년경 미신타파와 보건방역을 주제로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제목과 감독 등은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여타의 문헌상으로도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시기적으로 일본인이 운영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제작된 영화인 듯하다.- 필자)

고 즈음에 내가 다방 ‘비너스’를 했다고. 스물세살 때부터 서른살까지 8년 동안을. 한 일년은 가오마담(일명 얼굴마담- 필자)으로 있었지. 돈이 없으니깐. 그 담에 인수받고. 아주 우스운 게, 내가 무슨 뽀기(복싱?- 필자) 선수하고 연애를 한다고 소문이 났어. 그때 사실은 경성촬영소 앞에서 <지손의 구락부>라고, 상영도 못한 영화를 찍었는데, 그게 뽀기 펀치에 죽은 사람 복수하는 얘기거든. 그러니까 글쎄 다방 하면서 뽀기랑 연애한다고 어디 났대나 뭐래나.

비너스 다방에는 안 오는 사람들이 없었어. 나중에 자유당 하게 되는 사람들도 많이 왔지. 윤보선씨하고 서항석(초대 국립극장장- 필자)씨, 조택원(무용가- 필자)이도 자주 왔다구. 윤보선씨는 아주 영국 신사 같은 양반이었지. 와서 땐쓰 하고 뭐. 근데 땐쓰 한다고 나만 잡혀 들어갔지.(<삼천리> 1937년 1월호에는 복혜숙을 비롯한 대중문화의 중심인물들이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서울에 딴쓰홀을 허하라’라는 탄원서의 전문이 게재되었다. 식민적 모더니티의 정황을 엿보게 하는 흥미로운 문건이다.- 필자) 내가 처음 잡혀들어간 건 그릇 때문인데, 다방 인수받아서는 안성에서 그릇을 맞췄거든. 근데 거기에 태극 팔궤가 그려져 있다구 잡아가더라구.

“그때도 고속촬영을 했어”

그러고 있다가 <가고노도리>(<농중조>(籠中鳥))의 일본식 발음- 필자)를 1926년 조선키네마사에서 찍었지. 윤백남씨가 순한국사람 손으로 영화 만들겠다고 선포를 하고 만든 게 조선키네마사야.(‘윤백남프로덕션’에 대한 기억 착오. 이외에도 감독과 각본, 주연 등에 대한 회고 역시 현재 남아 있는 기록들과 다소 차이가 있다. 복혜숙은 대체로 사건의 흐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하나,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기억이 불분명한 편이다.- 필자)

나운규는 연기하는 게 아주 광적이지. 광기가 있어야 연기 해먹는다구. 나두 광기지 뭐유? 그때는 미국 활동사진 흉내내느라고, 눈에다 액체를 크게 해서(검게 칠한 아이라인을 말하는 듯- 필자) 다들 깜짝깜짝 놀랬대.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서양 년하고 뭐 다르지 않더구만” 이러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내가 남 흉내내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지.

<농중조>는 여학생으로서 자유연애 하는 얘기야. 원래 무대에서 했던 건데(토월회에서 공연- 필자) 그때는 주인공이 기생이었다구. 참 욕도 많이 먹었지만 여학생 남학생들한테는 아주 환영받았다구. 러브신을 찍는데. 장충동 가서 로케를 하니깐드루 사람들이 보지 뭐. 의자에 앉아서 손잡는 거 하고, 큰 나무 붙들고 이렇게 도는 거 하고. 그래도 그 나무 잡고 도는 거 찍을 때는 고속촬영을 썼다고, 일본놈들이.(<농중조>의 촬영은 가토오 교헤이(加藤恭平)가 맡았다.- 필자) 그렇게 찍고 있으면 구경하던 사람들이 “아이구 저것들 봐라, 저것들. 사람 보는 데서 막 그냥 손을 쥐고 지랄이구나.” 손을 뒤로 빼는 장면 찍으면 “그래도 감출 줄은 알어” 이래 가면서. 아휴, 참 남부끄러운 일들이 많았어.

<낙화유수>도 길에서 찍는데. 내가 천사 노릇을 하느라고 꼼짝도 못하고 섰으니까, 어떤 놈은 길 가다 와서 “아휴, 고거 이쁘게 생겼다” 그러면서 뺨을 꾀집고, 어떤 녀석은 치말 다 뒤집어보구. 그래서 내가 울고 그냥 야단을 하고 그랬지.

<홍련비련>은 주인공이 여배우야. 27년이지 아마. 이게 낮에 와서 촬영해다가 밤에 현상하구. 그래서 일주일에 다 된 영화라구. 그 기록이 있다구. 아무리 무성영화래지만 말이야 일주일에! 이명우가 이게 일주일 만에 다 될 거라구 그랬다구.(<홍련비련>은 이명우의 형인 이필우가 감독과 촬영을 맡은 작품이다.- 필자)

영화평론 모임에 떡국을 대주다 경찰에 연행

그 담이 찬영회 사건이지?(찬영회(讚映會)는 건전한 영화평론을 통해 한국영화를 보호하고 회원간의 교류를 증진한다는 취지로 1929년 설립된 단체다. 그러나 1931년 1월1일 신년 하례 모임을 하던 나운규, 윤봉춘, 서월영, 복혜숙 등이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난입해 소동을 피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직후 찬영회는 해산되었다.- 필자) 그때 내가 혼났다구.

그때는 참, 이름은 있어도 돈을 벌려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지. 그때는 한창 과도기가 돼서, 남자들은 유학을 다녀와서 이런저런 일들을 했지만, 여자들은 일본 유학 하고 와도 아주 참 거시기 하지. 근데 일본사람한테 무슨 얘기할 게 있다 이러면 날 불러서 해. 그래서 통역 노릇도 많이 했어. 그치만 광산 같은 사업에 대한 통역 노릇은 또 어렵잖우? 그래도 난 또 척척 해주지. 그러니깐드루 사람들이 “아주 그러지 말구 짬이 있을 적에는 기생 노릇을 해라” 그러더라구. 그래서 기생 노릇을 하다가, 찬영회사건 때는 떡국대회를 하는데 돈들이 있나 이 사람들이? 내가 “에유, 내가 시간 번 거 가지구 가서 돈 내주면 되는데” 그랬지. 그때 뭐 떡국이 한 그릇에 십전두 채 못 했어. 그런데 그때 기생이 한 시간에 일원이십전 받았다구. 인제 쪼금 보태서 그렇게 낸 건데, 나를 잡아다 놓구 “니가 기생질해 벌어 가지구 그 뒷돈 대느라 그러느냐”, 뭐 별 소릴 다 하드만. 그래서 내가 “나는 기생이 아니라 여배운데 돈이 없어서 벌러 나왔다. 그리고 내가 일본말을 다른 사람보다 잘하니까 통역을 할라구 기생을 했다”구 그랬지.

한번은 ‘105인 사건’ 변호하는 거 때문에 김봉문(105인 사건의 주동자- 필자)씨랑 이인(변호사- 필자)씨랑 일본 손님이랑 몇이 내가 일하는 데 왔더라구, 그래서 내가 손님 대접을 하는데 김봉문씨가 “호! 그년. 난 일본 년인 줄 알았더니 조선 년이로구나!” 뭐 이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당신이 일본 손님 대접은 날더러 맡아서 하라 그러지 않았느냐, 또 그 일본사람이 우리 한국사람을 위해서 변론해 주러 왔대니깐 난 기쁜 마음에 열심히 얘기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그리구 그 담부텀 일본말 안 한다 그랬어. 난 절대루 안 한다구. 그러구 증말, 안 하리라는 결심을 하니깐 말이야, 딱 입을 안 떼니깐드루, 일본말이 정말 안 됩디다.

그 담 <세 동무>는 이구영씨가 감독을 했을 거야.(<세 동무>의 감독은 김영환- 필자) 그 주제가가 아주 유명했다구. <장수만세> TV서 첨 했을 때야. 내가 께스트(게스트- 필자)로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나와서 <세 동무>를 부르더라고. 사회자가 “<세 동무>에 주연한 여배우가 누군지 아세요?” 그러니깐드루 몰른대. 그 노래만 좋아서 배왔대.

그 담엔 또 <지나 가의 비밀> 할 적엔 참 기가 맥힌 에피소드가 많아. 내용은 내가 조선서 유괴당해 가는 거야. 그때 이월화(<월하의 맹서>로 데뷔한 여배우- 필자)하고 할 땐데, 이월화가 나하구 할 때는 지가 밤낮 악녀만 하니까 싫대요 또. (웃음) 암튼 그걸 촬영하러 중국에 들어가는데 촬영기 공탁금을 물고 가래. 안 그러면 촬영기를 놓고 가래나? 그래서 촬영비용 백오십만원을 내고 들어갔다구. 들어가서는 감독(유장안- 필자) 일본 여편네 팔아서 영화 찍고.

그 담이 <수업료>인데, 여기서 내가 서른두살에 할머니를 했다구. 그 담부터는 입 때까지 계속 할머니 역이야. 최인규가 감독을 했지. 최인규는 재주가 너무 많았어. 재승박덕이란 말이 꼭 옳아. 성미가 아주 지랄이야. 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여배우고 뭐고 없이 따구를 때려서 얼굴을 이렇게 붓게 하고. 그러고는 나한테 “데리고 나가서 찬물 찜질 좀 해주슈.” 으이구, 내가 그것 때문에 속썩은 생각하면. 그래도 재주는 아주 무섭지.

맨 끄트머리에 <순정해협>인가? <순정해협>은 비행기가 자꾸 와서 자꾸 폭격을 할 적에 불을 모두 끄고 앉아서, “이러다 죽으면 뭐 순직했다 그럴래나?” 이래 가면서 숨어 있는 영화야. 신경균이 감독을 했었거든.(내용상으로는 신경균 감독이 1945년에 만든 어용영화 <감격의 일기>(感激の日記)로 추측됨. 1928년에 제작된 <순정은 신과 같다>와 제목을 헷갈린 듯.- 필자) 근데 불살라버렸대. 그대로 뒀어도 괜찮을 건데.

정리 최예정/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shoooong@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