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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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은영 2005-04-04

<아무도 모른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세계

어느 사려깊은 감독의 생에 대한 감각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느리다. 그를 직접 대면해 인터뷰한 기자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하며,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흐르는 긴 침묵을 견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섣불리 단정하거나 선언하는 법이 없다. 영화를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로 느리고 신중한 편이어서, 1995년 <환상의 빛>으로 데뷔한 이래 10년 동안 세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그의 소신 때문일 것이다. 배우와 창작의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만들어가는 다큐멘터리적 작업 방식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냉소하거나 비관하지 않는 그의 태도와 잘 어우러진다. 아동 방치의 실화를 정적인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재구성한 성장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는 그런 감독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첫 영화 <환상의 빛>에 대해 스승 허우샤오시엔이 들려준 이야기를 잊지 못한다. 대만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인연을 맺은 허우샤오시엔은 그의 극영화 데뷔를 격려하면서, <희몽인생>의 스탭들을 소개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더랬다. 먼저 “좋은 데뷔작”이라는 칭찬으로 운을 뗀 그는 가슴이 뜨끔하고 얼굴이 화끈대는 충고를 건넸다. “기술과 구도는 완벽하지만, 영화란 건 사람의 감정과 배우의 행위가 먼저 있은 뒤에 그것이 나중에 구도로 만들어지는 거다. 여기서는 구도가 먼저 고려돼 있다. 이건 거꾸로다. 다큐를 찍은 사람이 왜 그랬냐.” 치밀한 콘티와 구도가 먼저였던 게 문제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왜 희열을 느끼지 못했는지, 이 영화에서 왜 이질감이 느껴졌는지, 깨달았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다음엔, 또 그 다음엔, 이 영화에서 점점 더 멀리 가는 작품을 만들리라고.

허우샤오시엔의 충고 9년 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런 의미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첫 영화에서 멀리 나간 작품이 됐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반년 넘게 자력으로 살아간 네 남매의 실화를 모델로 한 <아무도 모른다> 작업의 핵심은 ‘아이들’이었다. 꼬박 1년 동안 감독은 계절별로 촬영과 편집을 마친 뒤에, 중간 결과물에 기초해서 다음 계절 이야기를 쓰고 찍고 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실제 아이들의 개성과 변화를 반영해서 에피소드를 만든 것은 물론이고, 저마다 다른 테이크에서 베스트를 발휘하는 아이들을 위해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같은 프레임에 담지 않았다. 카메라는 철저히 아이들을 따라붙었다. 아이들의 손과 발을 클로즈업한다는 설정은 미리 있었지만, 잦은 얼굴 클로즈업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감독은 무슨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듯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다”고 부끄럽게 고백하지만, 후반부의 비극적인 사건을 제외하면 별다른 사건이 없이 잔잔한 일상 묘사로 일관하는 이 영화의 애상적 감화력이 네 아이들의 맑고 고운 얼굴에서 풍겨져 나온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버려진 아이들의 영화는 최루적이게 마련이지만,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은 울지도 않고, 칭얼대지도 않는다. 이들은 어른들이 배제된 그들만의 우주에서 밝고 활기차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더 흥미로운 건 이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다. 16년 전 이 소재를 영화화하기로 했을 때 감독은 주인공 소년의 1인칭 시점과 내레이션을 구상했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신이 부모의 나이가 됐음을 깨닫고, 그들 곁에 서는 쪽을 택했다. “소년의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주고자 했다. 안아주는 건 안 된다. 포옹은 너무 친밀하다. 나도 카메라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와 같은 것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픽션의 베이스에서 다큐멘터리적으로 작업한 <아무도 모른다>는 감독의 소개에 따르면, 전작들의 종합판이자 완결편 같은 의미다. 차기작이 형식미를 강조한 시대극이라는 점으로 미뤄볼 때도, <아무도 모른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품 세계 첫 챕터의 마지막 단락을 차지하는 셈이다.

죽음을 통한 삶의 각성, 그리고 성장

<환상의 빛>

남편의 자살로 공황에 빠지는 <환상의 빛>의 아내, 생전의 행복한 기억을 선택하는 <원더풀 라이프>의 사자들, 종교단체의 집단자살 사건을 되짚어보는 <디스턴스>의 유가족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들을 꿰는 키워드는, 알려진 대로 ‘죽음’과 ‘기억’이다. 이는 죽음을 찬미하거나 신비화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돌아보고 긍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특히 죽음의 문턱에 서 자신의 삶을 통째로 복습하는 <원더풀 라이프>의 사자들의 모습에서 두드러진다. “죽음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고 삶이다. 살아남은 자의 변화가 중요하다. 어쩌면 죽음은 살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그가 말하는 살아남은 자의 변화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환상의 빛>의 아내는 재혼을 하고 평온하게 살아가다가, 지나가는 상여를 보고 문득 죽은 남편을 떠올린다. 남편이 왜 죽었는지 ‘모른다’고 인정하게 되기까지, 그렇게 길고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이다. 추억을 고르지 못해서 림보에 남아 있던 <원더풀 라이프>의 주인공은 연인의 행복한 기억 속에 자리잡은 자신의 모습에 깨달음을 얻는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도 의미를 발한다는 진실을. <디스턴스>의 아내와 남편과 동생들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남아 있는 삶이 외부와의 관계를 전제로 한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분신들은 모두 ‘성장’과 ‘성숙’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디딘다.

<아무도 모른다>는 전작들과 다르고도 같은 이야기를 건넨다.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방점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찍혀 있다. <씨네21>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감독은 언제나처럼 신중한 태도로 일관한다. “나 스스로는 기억과 죽음을 테마로 생각한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은 테마가 죽음에서 삶으로 바뀌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네 작품 모두 남겨진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지적이지만, 나 자신은 잘 모르겠다.” 그가 매번 작품 속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감상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밝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성장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로 커가는 나는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는 악취를 풍기는 보석”이라는 주제가 가사가 시사하듯, 그 성장이 희망과 같은 이름은 아니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사랑하는 작가

<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다큐멘터리스트의 이력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그는 본래 소설가 지망생이었지만, 활자보다는 이미지의 매력에 사로잡혀 영화와 시나리오를 탐식했고, 스튜디오 시스템에도 독립영화계에도 편입하지 않고 실험적인 작품들로 이름난 다큐 제작소에 합류하는, 좀 다른 선택을 했다. 기대했던 것처럼 창조적이거나 도전적인 작품들을 내놓을 수 없는 분위기에 실망하면서도, 그는 자료 수집을 하면서 자신의 관심사(사회 언저리의 사람들)를 찾아갔다.

극영화로 옮아온 계기도, 다큐멘터리에 있다. 허우샤오시엔의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그에게 감화를 받은 영향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환경청 관리의 자살에 관한 다큐를 찍다가 홀로 남겨진 미망인의 담담하고 아름다운 삶을 접하고, 극영화를 만들어보리라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환상의 빛>은 사색적이고 유려한 영상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았지만, 감독 자신에겐 만족스럽지 못한 작업이었다. “각본을 쓰고 콘티를 짜고 계획한 대로 촬영했지만,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나 자신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다큐적 작업 환경을 훨씬 즐겼던 것 같다.”

다시 초심으로, 익숙한 방식으로 돌아와 만든 작품이 <원더풀 라이프>다. <원더풀 라이프>는 인터뷰 내용을 보며 캐릭터를 선별해 캐스팅을 확정짓고,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처음엔 그들의 이야기를 훔치려는 생각이었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들의 표정, 그 진정성을 따를 수 없을 거라 판단해 직접 출연시키고 이야기를 하게 했다.” 한줌의 전문 배우들도 완성된 시나리오를 받아들지 못했고, 상당수가 다큐멘터리 출신이었던 스탭들은 촬영장의 ‘해프닝’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디스턴스>는 픽션과 다큐의 경계를 거의 지워낸, 조금 더 과감한 실험이었다. 역할에 대한 기본 정보만 받은 다섯 배우들은 스스로 대사를 만들고, 상황에 반응해 보였다. 감독은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잡으려고 카메라를 고정하지 않았고, 동선을 제한하지 않으려고 조명도 설치하지 않았다.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촬영을 진행하는 방식이나 배우들이 사석에서 했던 말을 영화에 반영하는 방식(<원더풀 라이프>에서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미래를 택하겠다고 버티는 이세야, <디스턴스>에서 하루의 끝이자 시작으로 사일런트 블루를 언급한 아라타)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방법론이 겹쳐 떠오르기도 한다.

방법을 먼저 내세운 적은 없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형식적 실험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내 영화가 픽션과 다큐의 경계를 부술 수 있길 바란다. 그 경계란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리 공고하지 않다.” 그가 기대한 것은 픽션과 다큐가 부딪칠 때 일어나는 불꽃 같은 기적이다. <원더풀 라이프>에서 새 옷을 입고 춤을 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택한 할머니의 즉흥 연기나, <아무도 모른다>에서 형과 싸우는 장면을 촬영한 뒤에 카메라 뒤에서도 냉전을 벌였다는 꼬마의 귀여운 혼란은, 영화 현장이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배우들이 ‘진짜’ 속내를 드러낸, 진귀한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