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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난함 아래 흐르는 도발, 토리 에이모스,

대중음악계 역시 남성들의 철옹성이다. 여성은 늘 타자(他者)였고 ‘대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1990년대는 여성의 대두가 돋보인 분기점이었다. 여성 밴드는 물론 여성 멤버를 앞세운 록 밴드가 봇물처럼 쏟아졌고, 남성중심적 록신에 ‘여성 록’(women in rock)이란 화두가 이슈화되기도 했다. 앨라니스 모리셋처럼 강한 여성의 목소리를 설파하는 일군의 솔로 슈퍼스타의 등장이라든지, 록 스타 계보에 커트 코베인처럼 여성적인, 아니 최소한 마초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등재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둘 만하다.

이와 같은 측면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토리 에이모스이다. 이 싱어송라이터는 강간당한 경험을 다룬 <Me and a Gun>, 자위와 죄책감을 다룬 <Icicle> 등 종교적 성장배경과 성적 충동 사이의 갈등을 토로한 일련의 곡들로 1990년대 초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트라우마와 맞서면서 이를 자기 고백적이면서도 관능적인 목소리로 형상화한 그녀의 음악이 얼터너티브 팬과 페미니스트 양쪽으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음악 저널리스트 앤 파워스와 공동으로 정리한 자서전 <Piece by Piece>와 함께, 여덟 번째 정규 음반 <The Beekeeper>가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웬만한 영화 한편과 맞먹는 80여분의 러닝타임에 19곡(!)이 실려 있는데, 수록곡들은 정원이란 비유적인 카테고리에 여섯 테마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수록곡들이 순서에 따라 묶인 것도 아니고 각 테마 사이에 차이가 분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트랙 순서대로 듣든 테마별로 나누어 듣든 상관없을 듯하다.

더블 앨범에 적합한 수록곡 수나 컨셉 앨범에 가까운 짜임새를 볼 때 야심적인 음반임을 느끼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가사나 사운드 모두 지나칠 정도로 세련되고 무난하다. 데뷔작의 숨결을 떠올리게 하는 <Parasol>, 다미엔 라이스가 노래에 참여한 <Sweet the String>, 훵키한 가스펠풍의 <Witness>, 1960년대 걸 그룹 스타일의 <Ireland> 등 스타일은 상이하지만 대부분 ‘어덜트’한 질감으로 마감처리되어 있다. 좋게 말하면 불혹의 나이에 걸맞은 성숙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지만, 1990년대 초반의 강렬한 작품들을 잊지 못하는 팬들에겐 밋밋한 음악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도 속단하지 말기를 권하고 싶다. 그녀의 시적인 가사 밑바닥에 늘 풍부한 함의가 담겨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