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나름의 크기가 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통상 ‘그릇’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릇의 크기가 그것이 담을 수 있는 용량으로 표시되듯이, 사람의 크기 또한 그것이 담을 수 있는 용량으로 표현된다. 그 크기는 그가 담아낼 수 있는 이질성의 폭에 의해 정의된다.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만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사람을 모아도 그 그릇이 크다고 말할 순 없다. 반면 몇 사람 모으지 못했지만, 그 모인 사람들의 이질성이 크다면, 그 그릇의 잠재력은 아주 큰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그릇이 큰 경우는 아마 자아가 사라져버린 사람, 그래서 어느 것도 담을 수 있게 된 사람일 게다. 비움의 공덕, 그것은 비움으로써 세상 전체를 담을 수 있도록 커지는 것이다.
비슷하게, 나라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릇의 크기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어떤 나라의 직접적인 영토가 그 나라의 크기를 결정하진 않는다. 그보다는 역시 그 나라가 싸안을 수 있는 이질성의 폭에 의해 그 나라의 스케일이 정해진다. 비슷한 인종, 비슷한 종교를 가진 사람만을 수용할 수 있을 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싸안을 수 없는 나라는 그 영토가 아무리 넓어도 그릇이 크다는 감응을 주진 못한다.
이런 점에서 전후 일본은 그 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릇이 급속히 작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명치유신 이후 밀려오는 서구의 힘에 대항할 길을 모색하면서 일본에서는 수많은 아시아주의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아마도 거대한 적인 서구와 대항하기 위해 혼자만의 힘으론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혁명에 참여하기도 하고, 낭인들처럼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의 근대화를 촉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물론 나중에 우익적인 성향의 집단으로 변화되기도 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아시아인의 연대를 꿈꾸는 ‘아시아주의’가 적어도 일본으로 하여금 일국적 범위를 넘어서 사고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좋든 싫든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일본인 청중을 염두에 둔 것이어서인지, 1924년경 쑨원은 대아시아주의에 관한 연설에서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큰 희망을 표시하고 있다. 그는 러일전쟁의 승리를 서구에 대한 동양의 승리로 받아들이면서, 아시아의 연대에서 일본의 지도적 지위를 상기시킨다. 침략의 논리, 제국적 지배의 논리와 섞이고 교차하면서 제시되는 이러한 연대의 논리는 이후 만주국의 건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밀고 나가는 가운데서도 변형되어 반복된다. 어떤 가치평가를 하든 간에 1940년대까지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아시아 내지 동아시아라는 스케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대동아’의 구상은 더이상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심지어 왕조명처럼 일본이 제시한 연대의 구상에 호의적인 사람조차 설득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시아에서 자신의 특별한 지위나 자신의 거대한 힘에 대한 자만, 그리고 힘에 의한 통합을 연대라고 생각하는 착각, 따라서 자신의 모습을 확장하거나 그에 맞추어 동질화하는 방식의 연대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힘이 강성하게 될 수록 그 그릇은, 담을 수 있는 이질성의 폭은 작아졌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독도문제나 역사 해석 문제 혹은 신사참배 문제 등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태도를 보면, 아시아연대는 그만두고, 그나마 동아시아의 맹주를 꿈꾸던 제국적 스케일조차 찾아볼 수 없다. 아주 작은 사안 하나도 비울 줄 모르는, 가장 가까운 이웃조차 담을 수 없는 너무도 작은 일본만이 보일 뿐이다. 유럽에서 여러 나라가 새로운 차원의 연합체를 구성하고, 남미에서 새로운 연합체를 꿈꾸는 시점에, 동아시아의 차원에서조차 정치인(!)들이 새로운 연대를 꿈꾸지 못하는 것은, 침략적 과거조차 내려놓을 줄 모르는 일본 우익인사들의 편협한 자존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적 스케일을 저 낮은 수준에 묶어놓은 일차적인 이유일 것이다. 이는 우리는 물론 아시아인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이다. 피할 수 없는 상대가 큰 그릇이 아니라 편협하고 작은 상대란 것은 나 자신 역시 그처럼 작아지고 편협해질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것을 향해 자신을 여는 것, 나를 낮추고 비우는 것, 그것이 자신이 커지는 최선의 방법임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