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
1999년 코리아게임오픈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한국의 게임리그는 현재는 온게임넷·MBC게임 양사로 대표되는 정규 스타리그와 팀리그를 비롯해 “온게임넷 경기 보는 것만도 벅찰 정도”라는 엄재경 해설위원의 설명처럼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오늘이 있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선수, 해설자, 캐스터 혹은 사업가로 꿈을 키워온 네 사람을 소개한다. 게임팬이라면 턱없이 간략하고 부족한 설명이겠지만 영화팬들에게는 새로운 얼굴로 기억될 한국 게임리그의 산 증인들.
프로게이머의 선구자 임요환
“영원한 현역으로 남겠다”
“지금 나가면 화장실도 못 가요.” 온게임넷 올스타전을 막 마친 뒤 메가웹 스테이션의 선수대기실에서 만난 임요환 선수가 건넨 첫마디. 그에 대한 팬들의 열광적인 관심이 곧바로 확인된다. 경기마다 그의 일상적인 손짓 하나에 수백명의 오빠부대가 비명을 지르는 것은 당연지사. 독보적인 숫자인 팬클럽 가입자가 55만명. 다른 분야의 어떤 인기스타들도 명함조차 내밀기 어렵다.
테란의 황제, 환상의 테란, 드롭십의 마술사라는 별호의 임요환. 프로게이머의 선구자인 그가 없었다면 현재 스타리그의 중흥은 어려웠을 것이다. 테란이라는 가장 약했던 종족을 게임리그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렸고, 홍진호와 더불어 ‘임진록’(임요환과 홍진호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라는 최고흥행의 라이벌전을 만들어내며 게이머도 자기관리만 있으면 5∼6년 제대로 된 성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희망을 몸으로 보여줬다. 연봉 계약, 체계적인 팀 운영, 광고를 비롯한 수입 등 게임리그에서 게이머에게 발생하는 현실적 문제를 자기 방식으로 처음 해결한 것도 그다. 후발주자와 게임리그에 그것은 지침서가 되었다.
“우연히가 아니라 처음 게임리그에 참여할 때 프로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임요환은 “영원한 현역으로 남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한다. “남들은 그냥 앉아서 플레이한다고 생각하지만 연습환경이나 정신적인 괴로움, 지속적인 전략 개발의 필요성 등의 환경”을 지적하며 <스타크래프트> 선수생명이 유독 다른 스포츠의 선수들보다 짧은 배경도 상세히 설명했다. 게임리그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전용경기장의 필요성, 구단 중심의 리그문화의 정착”이 과제라는 답변은 그가 게이머 개인을 넘어서서 게임계 전반을 걱정하는 베테랑임을 보여준다.
기기묘묘한 전략가 장재호
“하루에 10시간 연습”
MBC 프라임리그 13연승 전승 우승, 현재 WEG2005 9연승 결승에 진출한 상황. 취미는 ‘안드로메다 관광’ 운전사인 <워크래프트3> 프로게이머 장재호. 나이트엘프를 주종족으로 삼는 장재호지만 게임마다 기기묘묘한 전략을 보여주는 그를 팬들은 ‘제5의 종족’이라 부른다. WEG의 주관사 아이스타존 사무실에서 만난 판타지스타 장재호의 모습은 수줍고 순박하기만 하다.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간 곳이 없다. 중학교 2학년 때 <스타크래프트>를 시작했고, “당시에는 임요환 선수가 존경스러웠다”는 장재호는 현재 낭만오크 이중헌 이후 <워크래프트3> 리그를 이끌 ‘임요환급’ 슈퍼스타이다.
선수촌에서 모두 함께 생활했던 이번 WEG대회에서 중국 선수들이 장재호의 연습량에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 장재호의 평소 연습시간은 하루 10시간 정도라고. WEG에서 중국 선수 조우천이 번번이 실패한 전략을 보완하여 프라임리그 결승에서 사용해 압도적인 승리를 끌어낸 경우는 장재호가 얼마나 탁월한 전략가인지를 잘 보여준다. 현재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로는 “이번 결승전에서 격돌하게 될 오크 황태민 선수”를 꼽았다.
과거에는 휴먼 박세룡도 그랬다고. 사귄 지 두달이 된 “여자친구와 팀플레이를 하면 랜덤을 하기 때문에 자주 지기도 한다”는 에피소드나 “대학 진학은 내년쯤 생각한다”는 사적인 계획을 듣노라면 그는 그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끄럼을 많이 타는 소년이다. 황태민이나 천정희 선수처럼 외국에서 활동할 계획은 없느냐는 질문에 “마우스스포츠라는 유럽팀에서 현 소속팀을 그대로 영입하는 계획이 진행 중”이라고 답했다. 유럽리그에서 활약할 안드로 장의 모습을 기대해보자.
게임리그를 키운 해설위원 엄재경
“스타리그 10년은 더 갈 것”
WEG 정일훈 캐스터와 온게임넷 황형준 PD가 갓 태어난 한국 게임리그라는 아이의 외모를 돌보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동안, 그 아이를 집안에서 어르고 바로 자라도록 키워낸 사람은 엄재경 해설위원이다. 5년 전 그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스타크래프트> 리그(이하 스타리그)는 4∼5년 뒤에는 게임계에서 바둑 같은 클래식이 될 것”이라던 그의 예상은 사실상 100% 적중했다. 5년 만에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케이블계의 독보적인 킬러 콘텐츠이자 10∼20대의 지배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앞으로 최소 10년은 더 갈 것”이라는 것이 엄 위원의 이번 예상.
“올림픽파크의 야외무대에 섰을 때나 이메일로 스타리그 덕에 거식증을 고쳤다거나 군대가기 전까지 가장 큰 위안이었다고 밝혀온 독자들의 일상”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평소 그의 “끝났죠!”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어법이 직설적이고 담백하고 명쾌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을 터. <스타크래프트> 외에 다른 게임의 리그화가 성공하겠느냐는 질문에 “스타리그 해설자인 제가 다른 종류 게임리그의 성패를 걱정 운운하는 것은 프로야구 해설자가 프로축구의 흥망성쇠를 걱정하는 격”이라고 잘라 말하는 엄 위원은 “다만 스타리그가 처음 시작하던 시절만큼 어려움을 겪더라도 장기적으로 그 게임에 투자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유행어는 오히려 독”이라며 게임의 전체 흐름을 중시하는 해설관도 그가 생각하는 게임중계의 방향을 엿보게 한다. 과거 만화 스토리작가가 본업이던 엄 위원은 “내 굴을 내가 판 것일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스타리그 해설자에 전념하며 여전히 재밌게 살아가고 있다.
프로게이머의 형 캐스터 정일훈
“ WEG를 메이저리그로”
“프로게이머들을 더이상 PC방, 주유소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라는 게시판의 술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일훈 캐스터는 대부분 프로게이머들의 영원한 ‘형’이며 동시에 한국형 e-Sports의 국가대표 전도사이다. 그가 i-TV의 메인앵커 자리를 박차고 세계 최초의 게임캐스터로 나선 지도 벌써 6년이 흘렀다. 정일훈은 스타리그 중계 도중에 스스로 내뱉은 “누가 <스타크래프트>를 스포츠가 아니라고 했습니까”라는 멘트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다.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스타리그의 품를 떠나 각고의 노력 끝에 3년 만에 마련된 세계대회가 바로 WEG다.
“중국과 한국이라는 아시아를 거점으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들과 e-Sports의 메이저리그를 만드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표다. 참고로 e-Sports는 중국 정부가 인정한 99번째 정식 체육종목이며, 정일훈은 중국 국가체육총국 인민체육위원회 e스포츠 분야 고문이기도 하다. 한국 선수 황태민과 장재호가 격돌하는 첫 WEG <워크래프트3> 결승전은 중국 베이징에서 3월18일 거행된다. “2005년 첫 시즌을 맞이한 WEG는 예산 18억원 규모로 250억원 규모의 WCG를 능가하는 마케팅 효과를 기록”한 점이나 “스타리그가 프로야구보다 시청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마케팅 효과가 인정되지 않는 것은 한국 게임리그 시장의 협소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분석은 긍정적이다. 그는 처음에는 단순히 재밌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 나중에는 게임리그 자체에 매료되어서 일을 벌였다고 한다. 그의 두 번째 꿈인 WEG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