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게임리그를 일년 내내 진행하는 나라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중계하는 세계 최초의 게임전문 방송사가 존재하고, 국가별 대표를 선발하여 세계대회도 개최한다. 그곳은 바로 이곳 한국이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프로그램은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라는 미국 회사가 개발했지만, 스타리그는 한국 기업과 팬들이 만들어낸 개별적인 창조물이며 새로운 문화 현상이다. 제6회를 맞이한 삼성 주최의 세계 게임올림픽 WCG(World Cyber Games)가 총 8개 종목, 70여개국 참가로 11월 싱가포르에서 본선이 개최될 예정이며, 국내 기업 아이스타존이 주최한 WEG(World e-Sports Game)라는 새로운 세계대회가 2005년 벽두 <카운터 스트라이크>와 <워크래프트3>의 경기로 게임팬들을 열광시켰다. e-스포츠라는 이름으로 게임리그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리그에 열광하는 사람들. 한국 축구를 빗대어 말하자면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가 궁금한 그들이 말하는 한국 e-스포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전쟁은 싫지만 혼이 담긴 대결과 승부를 사랑하는 이라면 e-스포츠 세계에 도착한 것을 환영한다.
투신 vs 머신 ‘신들의 전쟁’아이옵스 온게임넷 스타리그 결승전 현장을 가다
지난 3월5일 토요일 오후 6시, 인천전문대 체육관에는 1만명 남짓한 관객이 운집했다. 추운 날씨에도 체육관을 꽉 채운 사람들 앞에는 두대의 타임머신이 놓여 있다. 타임머신은 게이머, 게임팬들이 온게임넷 스타리그 결승전에 사용하는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결승전 전용 게임석을 지칭하는 용어다. 인천에서 펼쳐지는 첫 야외중계인 탓에 방송 관계자들과 게이머들은 관중 동원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적색과 흰색 응원봉을 손에 쥔 양쪽 응원석의 분위기는 어느 지역 로드쇼에 뒤지지 않는 열기를 뿜어낸다. 예고편격인 크라잉넛과 비보이즈의 열띤 축하공연이 막을 내리고, 드디어 본 게임이 시작된다.
저그냐 테란이냐, 박성준 vs 이윤열
아이옵스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대미를 장식할 결승전. 이제까지 치러진 온게임넷 스타리그 열다섯번의 결승전 중 테란과 저그가 맞붙은 경우는 전부 다섯 차례. 상대 전적은 테란이 5전 전승. 역대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저그가 우승한 적이 단 한번 뿐이고 대테란전 결승성적은 더욱 참혹하다. 그럼에도 저그팬들이 오늘 결승전에 희망을 거는 이유는 이번 진출자가 박성준이기 때문이다.
온게임넷 역사상 최초 정규리그 우승을 일궈낸 주인공, 테란이 독점한 게이머 랭킹에서도 최초로 1위를 쟁취한 ‘투신’(鬪神) 박성준. ‘투신’은 그가 변성철과 홍진호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 공격형 저그이며 국지전에서 신에 가까운 컨트롤을 발휘하는 그의 전투능력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그러나 결승전에 걸맞은 상대가 그와 대적한다. ‘머신’(Machine) 이윤열. ‘천재테란’이란 이름으로 온게임넷 스타리그에 처음 진출해 곧바로 우승했던 전력을 가진, 현존하는 가장 강한 테란 중 하나인 그가 2년 만에 왕좌에 재도전한다. 팬들은 두 게이머의 닉네임을 따서 이번 격돌을 ‘신들의 전쟁’이라 칭했다.
이윤열, 박성준, 저그유저 박태민은 최근 주요 대회 결승전에서 무대만 바뀌가며 격전 중이다. 결승전 전속격인 강수진 성우가 굵직한 목소리로 박성준과 이윤열을 차례로 호명한다. 불꽃이 터지고 무대 뒤에서 두 선수가 등장. 온게임넷 중계방송의 트레이드 마크인 지미집 카메라는 오늘도 사방으로 회전하며 객석과 무대 위를 날아다니듯 오간다. 관객 머리 위를 스치듯 움직이는 기다란 지미집을 통해 관객의 상기된 얼굴, 선수들의 손짓 하나하나가 그대로 안방의 브라운관으로 전달된다.
선수들이 긴장된 발걸음으로 무대를 향하는 동안, 무대 위에는 이미 소개된 해설자 3인방이 그들을 기다린다. 일명 엄·전·김 트리오로 팬들에게 명명된 이들은 단정한 연미복 차림으로 상기된 얼굴의 두 선수를 맞이한다. 이어지는 오늘의 각오와 예상. 전용준 캐스터의 방방 뜨는 목소리와 김도형, 엄재경 해설의 입담에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저그의 결승전 징크스에 대해 박성준 선수의 한마디. “2005년 3월7일 오늘 이 시간부터 테란이 조연이 되도록 만들어주겠습니다.” 이어지는 저그팬들의 환호. 인하대에 재학 중인 이윤열 선수는 거의 홈그라운드인 인천에서 열린 경기인지라 편안한 표정. 타임머신에 자리한 두 선수. 그리고 그들을 잡는 각각의 카메라맨들이 유리 밖에서 그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체육관을 가득 메운 1만 관중의 함성
언제나처럼 강렬한 하드록이 전쟁의 서막을 알리고 드디어 1차전이 시작된다. 환호는 긴장감 속으로 사라지고, 해설자들의 맵과 과거 전적에 대한 설명이 체육관 안에 조심스럽게 울려퍼진다. 저그 박성준의 우세가 점쳐지던 레퀴엠 맵에서 벌어진 결승전 첫 번째 경기. 마린 9기가 압박하고 파이어벳 1기와 메딕 1기가 절묘한 타이밍에 대오에 합류하면서 성큰 콜로니 2개가 완성된 박성준의 앞마당이 단숨에 파괴된다. 급속도로 기울어지는 전황. 박성준의 GG(Good Game, 게이머가 게임에 졌다는 것을 시인하는 메세지). “단 5분47초 만의 한방, 이윤열의 강력한 한방, 받아칠 수 없는 한방으로 박성준을 제압”했다는 전용준 캐스터의 전언처럼 저그팬들의 꿈은 단칼에 베어졌다.
전술의 엇갈림이나 이윤열이 단 한순간의 타이밍을 노리는 러시를 감행했던 배경은 온게임넷에서 재시청하거나 PGR21(www.pgr21.com), 파이터포럼(www.fighterforum.com), 우주(www.uzoo.com)의 논객과 팬들이 써내려간 후일담과 분석을 참조하면 될 터. 알케미스트 맵에서 치러진 2차전은 물량전 양상으로 번졌지만 디펜시브 매트릭스를 걸고 날아간 이윤열의 두대의 드랍십이 승부를 갈랐다. 6시 멀티를 두고 지속적인 공방전을 벌였다면 ‘내추럴 본 파이터’ 박성준에게 좀더 승산이 있었겠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판단으로 게릴라부대를 편성해 우회하여 적진의 심장을 찌른 이윤열의 냉철한 상황판단이 돋보였다.
‘투신’ 위에 ‘머신’
기자실에 함께 있던 관계자들은 “왜 본진 방어를 하지 않는 건가, 평소의 박성준답지 않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토로하는 분위기. 숨가쁜 두판의 진검승부 이후 15∼20분 정도의 휴식이 주어졌다. 과연 박성준은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타임머신 안에서 나오지 않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는 그의 눈빛에서 비애와 긴장이 동시에 묻어난다. 이런 순간에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다. 스스로 상황을 해결하거나 그대로 무너지거나 모든 것은 그의 두손에 달려 있다. 그것이 승부사의 길이다.
기요틴 맵에서 맞이한 3차전은 초반 이윤열의 투탱크 드랍이라는 복고 전략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 선수의 본진이 동시에 불타오르며 소수 병력의 교전이 끝없이 이어진다. 칼날 위의 줄다리기. 그러나 사이언스 베슬의 활약으로 이윤열은 자신의 두 번째 결승전도 깨끗이 마무리한다. 3 대 0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와는 별개로 타임머신 속에서 망연자실하는 박성준도, 무대 위로 나와 포옹하는 이윤열도 기진맥진하기는 마찬가지. 구경꾼 눈에도 매판 승부가 그들의 숨통을 옥죄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또 한번의 승부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승부는 끝났지만 떨림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 꺼진 체육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리는 1만 관객의 등이 강백호처럼 속삭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게임리그가”라고.
겜맹이면 어때? 용어부터 배우자!
테란, 저그, 프로토스: 스타크래프트를 구성하는 세 종류의 종족.
마린, 파이어벳, 메딕: 테란의 바이오닉 부대를 형성하는 유닛. 마린과 파이어벳은 공격유닛, 메딕은 둘을 치료하는 유닛이다.
드랍십: 테란의 수송유닛, 모든 유닛들을 인원 수에 따라 태우고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성큰 콜로니: 저그의 방어 타워. 지상유닛들만 공격한다. 공중유닛을 공격하는 타워는 스포어 콜로니.
사이언스 베슬: 테란의 보조공격유닛.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적의 유닛을 탐지하고, 이레디에이트와 디펜시브 매트릭스라는 스킬을 사용한다.
디펜시브 매트릭스: 사이언스 배슬의 스킬로 해당 아군 유닛에 255의 데미지를 견딜 수 있는 보호막을 생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