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 아니,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다. 당신들의 일각에서 벌어진 부패를 두고 노동귀족을 거론하는 것도 도를 넘어선 지적은 아닐 것이다. 운동이 비즈니스로 전락하고 노동자의 힘이 권력으로 타락할 때 남는 것은 절망과 냉소뿐이라는 것을 나는 절감하고 있다. 절망과 냉소의 깊이는 이 부패를 두고 정부와 언론의 음모, 그리고 침소봉대로 대응하는 모습에서 그 바닥조차 짐작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또한 이런 타락과 배신의 풍토가 만연해 있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도 고통스럽다.
당신들의 지적처럼 “자본이 노동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노조간부를 매수함으로써 민주노조를 말살하려던 건 예견된 상황이었고, 정권은 이를 활용하고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결론은 달라질 것이 없다. 자본이 노동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적이 언제 어느 때에 있었던가. 노조간부를 매수하려 노력하지 않았던 적이 언제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자본이 민주노조를 말살하려 하지 않았던 적이 언제 있었던가. 정치권력이 그것을 활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때가 또 언제 있었던가. 그 모든 것들은 자본의 천성적이고 근본적인 욕망이 아니던가. 내가 절망스러운 것은 자본의 그런 욕망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승리를 거두어왔다는 사실이고, 너무도 당연하게 당신들도 그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괴로운 것이다. 진실을 말한다면 당신들은 자본에 화살을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 스스로의 타락한 심장을 향해 그 화살을 겨누어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한때 그토록 충만하게 여겨졌던 노동자계급의 대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주역으로서 당신들의 대의는 지금 어느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가. 실질 최저생계비를 저 멀리 웃도는 고임금 노동자들을 무한한 임금인상의 탐욕 속으로 밀어넣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이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실업자들, 외국인노동자들을 그토록 홀대하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이라면 노동자계급의 대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당신들이 자본과 정치권력을 비난할 권리는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한때 노동조합은 예외없이 어용노조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 노동조합이란 노무관리조직의 하나에 불과했고 조합장의 자리란 뒷돈을 착복할 수 있는 노예권력을 보장받는 자리일 뿐이었다. 돌이켜본다면 민주노조운동은 그 모든 배신과 부정, 부패의 쓰레기 속에서 장미처럼 피어난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길고 길었던 어둠의 세월을 헤치고 달려, 오늘 여기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깊은 어둠이 우리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진정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운동이 도처에서 불온한 탐욕에 무릎을 꿇고 도덕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노동운동마저 그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것이고, 노동자만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희망이 파열음을 내며 너무도 잔인하게 균열하고 있다는 것이다.
탐욕이라는 자본의 유혹에 단호하게 맞서 싸울 수 없다면 당신들은 결코 우리의 꿈과 희망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탐욕이라는 유혹에 무릎을 꿇는 순간 당신들은 계급의 영혼을 기꺼이 자본에 헌정하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자본주의의 탄생 이후 세계노동운동사가 그토록 집요하게 반복해 나열했던 종장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참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당신들의 뒤를 쫓아 똑같은 길을 달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
도대체 텔레비전 인치를 늘리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좀더 좋은 물건을 소비하고, 좀더 좋은 음식을 먹고, 좀더 비싼 옷을 입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고통받고 억압받는 동료들의 처지를 외면해도 좋을 만큼 행복해지는 것인지 나는 진정으로 회의하고 있지만 당신들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럼으로 자본의 배부른 노예가 되기를 원한다면 나 역시 그 길을 따라갈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당신들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주역임을 믿고 있으니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의 당신들이 그 꿈을 이룰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