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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이어 <왕의 남자> 연출하는 이준익 감독

“사극의 반란은 계속된다”

이준익 감독은 요즘 바쁘다. 우선 제작사 씨네월드의 대표로 할 일이 많다. 한편으론 <황산벌>에 이어 또 한편의 사극영화의 촬영을 준비 중이다. 삼국시대의 전장을 지역별 사투리의 경연장으로 뒤덮고, 희극과 비극을 한자리에 모아봤던 <황산벌> 이후 그의 두 번째 연출작의 제목은 <왕의 남자>(제작 이글 픽쳐스)다. 폭정의 시간으로 기록되어 있는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광대와 왕이 서로의 역할을 비추면서 한판 놀아보고, 맞장떠보는 영화다. 크랭크인 준비까지 다 해놓고 기다리다, 영화계 병풍으로 주인공 역의 배우가 군대를 가는 바람에 다소 지연되긴 했지만, 6월경 드디어 촬영 예정이다. 그의 사극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계속된다. 그 얘기를 나눴다.

-<왕의 남자>는 시나리오 분위기만으로 보면, <황산벌>하고 비슷한 면이 있다.

=사극은 원래 비극이 많다. 사극을 소재로 찾다보면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과 사건에 관심이 간다. 그런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가볍고 유쾌하게 전달하려는 게 내 목적이다. <왕의 남자>는 <황산벌>하고 장르적인 편차가 크다. <황산벌>은 코믹쪽을 더 두드러지게 해놓고, 낙차를 심하게 비극으로 가서 두개 장르가 붙어 있는 듯한 것이었는데, <왕의 남자>는 좀 다르다.

-구상의 동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권력에 대한 대응방식이 다른 민족하고는 좀 다른 것 같다.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는 절대권력에 대한 존중이 강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쟁이 일어나도 왕이나 정규군은 도망가고 농민이나 의병, 승병이 나라를 지킨다. 민중이라는 주체가 권력에 대한 종사, 통치의 도구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권력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의문, 때로는 대반격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게 우리나라다. 연산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최고권력과 최하층민의 충돌을 통해서 그 당시 다른 신분의 하층민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한다.

-원작 연극 <이>는 언제 봤나.

-연극을 안 봤고 대본을 먼저 봤다. 지난해에. 연극이 있는 줄도 몰랐다. 이른바 연산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이것이 연산이든 논산이든 그건 상관이 없다. 조선의 광대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더 드러내보자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광대,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로프>에 나오는 광대, 중국의 경극배우, 일본의 가부키 배우, 프랑스의 피에로, 모든 민족에는 광대라는 역할이 있다. 광대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을 풍자하고 야유하고 조롱함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이다. 우리나라에도 수백년 전부터 그런 모습과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민족 개개인 안에 그런 게 천부적으로 진하게 배어 있다.

연산도 자신의 광대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인물이라는 게 내 해석이다. 왕의 피를 타고 태어난 광대 장생과 왕 같은 광대 연산인 거다. 세상을 주무르는 것은 왕이지만, 놀이판에서는 광대가 왕이다. 근데 세상이 그 놀이판을 지배하려고 하면 세상의 왕과 놀이판의 왕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연산과 장생의 충돌로 보여질 거다. 사극의 소재를 자꾸 확장하는 것이 나에게는 과감한 영화적 시도이고, 그걸 구현해내는 방식 안에 세상을 압축해내는 인물과 플롯이 있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그것으로 짜낸 것이 <왕의 남자>다. 원작 <이>하고는 방향이 좀 다를 거다.

-어떻게 다른가.

=연극에서는 권력에 가까이 있는 자가 권력에 더 물들기 쉽다는 식의 속성을 드러내는 방향이었다면, 영화 <왕의 남자>는 권력도 역시 인간관계 안에서 파생될 가치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광대극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마당극이기 때문에 연극하고 잘 어울린다. 극의 형태 자체가 영화적 문법하고 마당극의 문법하곤 편차가 크다. 그런 걸 잘 담으려고 한다.

-그런 극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던데 어떻게 표현할지 계획이 있나.

=안성에 남사당 보존회가 있다. 본래 남사당은 여섯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땅재주, 접시 돌리기, 꼭두각시 놀이, 줄타기 등 이런 것들을 배우들이 가서 충분히 다는 아니더라도, 느낌을 트레이닝하도록 할 계획이다. 시나리오상에서 구체적으로 극을 보여주는 형태가 서술돼 있기 때문에 그건 카메라 메커니즘에 의해서 배우하고 감독하고 장면을 구현해내면 된다. 그래서 기존의 연극배우들 중에서 풍물, 사물 등을 했던 연기자를 대거 기용했다. 주인공 장생이가 줄광대인데 광대 중에서도 가장 기예가 뛰어난 것이 줄광대다. 우리나라 줄광대 명인을 감수나 코치로 데려와서 원거리에서는 대역도 하고, 가까운 숏에서는 코치도 하게 할 거다. 우선 4월부터 배우러 가기로 했다. 한 두달 정도.

-자료들도 많이 찾아봤겠다.

=광대에 관련된 책이라든가, 공연들, 연산시대의 정치적 배경, 탈에 대한 것들, 줄타기에 대한 것들, 구체적인 광대들의 종목에 따른 내용들, 그런 걸 찾아봤다. 우리나라 줄광대 인간문화재를 만나기도 했고, 전통공연기획제작자도 만나봤다.

-장생은 감우성, 연산은 정진영, 그러면 공길은.

=공길은 오늘 결정됐다…. 그건 제작자에게 듣는 게 낫겠다.

-공길 배역으로는 어떤 점에 주안점을 뒀나.

=남자지만 여성성이 많이 배어나오는 배우. 공길 역의 배우가 연기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영화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장생과 연산을 상대하면서 리액션을 받을 만한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난이도가 높은 신으로만 골라서 오디션 보고 뽑았다.

-연산을 정진영으로 캐스팅한 이유는.

=연산이라는 존재가 폭군으로 자리매김됐지만, 기본적으로 명석하지 못하면 자기 논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정진영이라는 배우는 나름대로 먹물냄새도 나고….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눈, 세상에 대해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 의심, 의구심들을 확인해가는 과정 속에서 기행들이 나오는 거 아닌가? 정진영이라는 배우에게 뭔가 예민하고 섬세한 도전을 한번 시켜보고 싶었다. 그전까지 주어진 캐릭터 안에서 큰 변주없이 꿋꿋하게 연기해나가는 스타일이었다면, 연산군이라는 캐릭터에서는 중의적이고 다면적인 그런 것들을 끄집어내 보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벌써 나하고는 네 번째 작업을 해오는 거다.

-감우성 캐스팅 과정이 재미있다.

=감우성이 <간큰가족>을 지방에서 찍고 있어서 이메일을 보냈는데, 답이 온 게 시나리오는 너무 마음에 들고 좋은데, 장생이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자기 이미지하고 맞는지 연상이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떤 배경으로 자기에게 장생을 의뢰했는지 궁금해했다. 그래서 내가 장문의 이메일로 답변을 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장생은 엽전 냄새 풀풀 나는 전형적인 광대를 연상할 것이지만, 본래 상업영화는 관객의 예측은 벗어나되, 기대는 저버리지 마라, 이게 제1법칙이다.

감우성이 줄광대 역할을 한다는 건 아무도 예측하기 힘든 캐스팅이다. 기본적으로 연기력을 믿고, 도회적인 마스크를 가진 사람이 조선시대 광대성의 신명, 광기를 드러낼 때 그게 진짜 새로운 거다. 냉소적이고, 도회적이고, 용의주도한 단호함은 이미 한번씩 해봤으니 <왕의 남자>에서 한번 광기와 신명을 끌어내서 시원하게 한판 놀아보자, 이렇게. 만나서 얘기했는데, 이해는 가지만, 느낌이 안 온다고 했다. 그래서 분장 테스트를 거치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 좋다 하고, 일주일 뒤에 의상, 분장에 수염도 붙이고, 가발도 쓰고 분장 테스트를 했더니, 생전 처음 보는 감우성의 예측할 수 없는 비주얼이 나온 거다. 그래서 바로 오케이. 결정난 거다.

녹수 역도 도시적 이미지가 강한 김서형을 캐스팅했다. 반면 육갑, 칠득, 팔복이는 된장 뚝배기 냄새 나는 배우들로 구성했다. 육갑은 유해진이고, 칠득이는 <영어완전정복>에서 농사꾼 출신 학생으로 나온 정석용이고, 팔복이는 이승훈이라고, 연극 <이>에서 장생 역할 했던 친구다.

-<황산벌>에서는 사투리가 관객에게 말을 거는 포인트였다. <왕의 남자>에서는.

=광대들이다. 한국영화에서 광대의 놀이라든가, 광대 삶의 정체성 같은 걸 직접 카메라를 들이댄 걸 거의 못 본 것 같다. <장길산>에서는 광대 출신의 혁명가쪽으로 몰았지만, 광대의 삶 자체가 메인은 아니었다. <왕의 남자>에서는 이 땅의 광대라는 존재, 수백년 동안 지탱해왔던 광대의 역할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럴 때 광대의 몸놀림도 있을 것이고, 줄을 탄다거나, 앞곤도 뒷곤도를 한다거나 인형놀이를 한다거나 하는 우선의 볼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대가 세상을 보는 눈이 <황산벌>의 사투리 못지않게 신선하게 다가갈 것이다.

-음악도 신경을 많이 쓰겠다.

=음악은 이병우씨가 하기로 했다. 화면 안에 들어오는 악기는 전통악기 소리겠지만, 영화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음악은 현대적인 걸 잘 믹스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이병우씨도 시나리오 보고 나서 굉장한 욕심을 냈다.

-원래 장생 역으로는 장혁이었지만, 병역비리 문제로 군대에 갔다. 많이 당황했겠다.

=쇼크였다. 갑자기 군대가는 바람에…. 크랭크인 날짜 다 잡아놓고 한달 반 전에 군대가면 얼마나 쇼크겠나. 100여명이 되는 스탭들 모두. 하지만, 시나리오는 잘 짜여진 설계도에 불과하다. 그건 책상머리에 앉아서 구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되어도 캐스팅이 되면 그에 맞게 고칠 수밖에 없는 거다. 시나리오대로 영화 찍어야지 하는 건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시나리오는 소중하니까 버려야 하는 거다. 영화를 기획하는 단계에서 시나리오 쓴 대로 캐스팅하지만, 그게 되고 나면 다시 다른 기준으로 전 시나리오를 버려야 한다. 배우 하나가 군대 가서 무너질 시나리오였다면 이렇게 못했을 것이다.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가 분명하고,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했으니까 감우성이 다시 하게 된 거지.

-영화 준비하는 지금 단계에서 가장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은.

=연기자들의 연기가 최우선이다. 광대보다 더 광대 같은 역할을 해줘야 관객이 배우의 이미지를 넘어서서 캐릭터 안으로 들어가는 거니까, 그게 가장 중요하다. 두 번째는 미술 파트. 사극에서의 미술은 현대극보다 다섯배나 열배 정도 힘들다고 보면 된다. 다 만들어야 하니까. 의상, 분장, 세트 모두 난이도가 상당히 높아서 염려가 좀 된다.

-촬영 장소들은.

=부안 궁궐세트가 있는데, 창덕궁, 경복궁을 섞어서 어전부터 시작해 처소까지 만들어놓은 세트장이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하느라고 만든 것이다. 양수리에서도 찍을 거고, <취화선> 세트장에서도 찍고, 수원 행궁에서도 있고, 저잣거리는 민속촌에서 하고, 양주 <대장금> 세트장에서도 일부 촬영한다.

-CG는.

=줄타기 전경 때 들어가지만, 기본적으로 정극이기 때문에 많지 않은 대신 정교하게 들어가야 한다.

-감독과 제작자를 둘 다 하고 있다. 드문 경우다.

=다급해서 하는 거다. 빚은 많지, 갚긴 해야지. 그러면 영화쟁이가 영화 찍어서 빚갚아야지 어떻게 하겠나. 어디 가 배추장사를 하겠나, 뭘 하겠나. 영화밖에 할 게 없으니까 영화를 찍어서 빚을 갚아야 되는 거고. 그러다 할 감독이 없으면 누구라도 해야 할 거 아닌가. 감독 뭐 국가에서 면허증 주는 것도 아니고.

-제작자로서 제작 마인드가 있다면.

=분명한 자기 생각을 갖고 영화를 기획해야 한다. 상업영화권 내에서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거다. 상업영화에서 새로운 걸 추구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위험성이 좀 있다. 그런데 그런 걸 추구해야만 영화를 계속 찍을 수 있다. 영화의 모든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약속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처음부터 공수표 날리지 말자는 주의다. 또 하나는 뭐 흔한 말이지만, 남의 돈이 내 돈보다 소중하다는 거. 영화를 돈으로 메우려고 하면 망하는 지름길이다. 돈으로 메울 자리를 몸으로 머리로 메워야 한다.

영화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나중에 주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에 그건 하늘의 뜻이다. 그 결과를 맞이하기 전까지 영화를 찍는 사람은 열심히 머리와 몸으로 영화를 채워야만 끝까지 죽을 때까지 영화를 할 수 있다. 영화 스탭들에게 물어보면 죽을 때까지 영화하다 죽으면 행복한 거죠, 라고 다들 말한다. 그러면 1만명이 영화를 했을 때 죽을 때까지 영화하는 사람이 몇이나 남아 있겠나? 내 생각에는 망했기 때문에 영화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흥했기 때문에 영화를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무슨 인생에서 대단한 존재 가치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일이니까 하는 거다.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 노동은 숭고한 거 아닌가. 나한테는 노동의 대상이 영화인 거지, 영화이기 때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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