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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혜> 3인3색 감상 [3] - 심영섭
2005-03-15

은희는 예뻤다… 그것뿐이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그애 이름은 은희였다. (가명입니다) 본드 불다 한번, 말 안 듣는 학교후배 손 좀 봐준다고 두들겨팼다 두번. 부모가 이렇게 가다가는 소년원이 제격일 것 같다며, 억지로 입원을 시킨 곳이 정신과. 그런데 내가 그녀를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다. 은희는 예뻤다. 처음엔 너무 소리를 질러서 독방에 있기도 했지만 곧 병실 한가운데 있는 탁구대에 나와 웃음을 흘릴 때면 탁구를 치던 남자 환자들이 그만 헛손사래를 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본인은 자기가 예쁘다는 걸 잘 모르는 듯이 행동했다는 것이다. 얼굴과는 정반대로 팔자걸음을 걷는가 하면, 면담 도중 어쩌다 ‘은희씨… 참 예뻐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펄쩍펄쩍 뛰며 ‘어휴 어휴 내가 뭐가 예뻐요. 내 눈에는 선생님이 더 예쁘다’라며 선머슴 같은 웃음을 씩 지었다. 하지만 커튼은커녕 작은 콤팩트에 있는 거울조차 다 회수한 병동에서도 (환자들이 자살 시도하는 걸 막기 위해), 거울 한번 안 들여다본 맨 얼굴로 나섰어도, 그녀는 대번에 눈에 띄었다. 그 얼굴에 고등학교 졸업장이면 시집이라도 번듯한 데 갈 것 같아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그녀는 학교든 병원이든 이 지긋지긋한 곳을 나가면 화장품 가게를 해서 돈 좀 벌거라고 큰소리를 치곤 했다.

그런 은희를 다시 본 건 그뒤로부터 한달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뜻밖에도 이번엔 정신과가 아니라 성형외과에 입원을 했다는 것이다. 간호사 보고 시간에 그녀가 응급실에 있다는 소리에 몰리던 졸음이 한번에 확 깨었다. 이마를 칼로 그었다고 했다. 이유를 몰랐다. 심리검사가 다 끝나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볼 일이 없는데도 그녀의 방을 찾았다. 그렇게 실실대던 웃음이 싹 가신 그녀의 얼굴은 딴 사람처럼 보였다. 이마에 둘둘 붕대를 만 그녀의 얼굴에선 프랑켄슈타인 영화가 떠올랐다. 기분이 안 좋았다는 것이었다. 우울하다는 것이었다. 동생이랑 대판 싸우고 꼴보기 싫은 년이 너무 많았다고 몇 마디 말을 탁 내뱉고 침대에 휙 드러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뒤 그녀가 왜 그랬는지를 안 것은 한참 뒤 뜻밖의 사람을 통해서였다. 2학기가 시작되고, 고참 주임 교수가 ‘인간과 정신병리’를 강의해주었을 때였다. 예민하기가 뒤통수에 레이더가 한 열개쯤은 붙어 있는 것같이 보이는 그는 모든 환자에겐 숨겨진 카드가 있다고 했다. 그걸 모르면 치료는커녕 아예 그 사람을 이해조차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는 칼같이 잘라 말했다. ‘여러분, 은희 있죠? 이마 그어서 입원했던 그 친구? 왜 그랬을 것 같아요? 그 친구 그 전날 남자 애들이랑 본드 불다 윤간당했어.’

그뒤론 나는 떠돌아다니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표면에 있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이은주가 노출 연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말도 믿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이 눈꺼풀이 처져서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그뒤론 ‘속성, 단기, 급전, 빨리 됩니다’ 같은 말도 믿지 않게 되었다. 통상 말이 항상 먼저 오고 관계가 가장 나중에 왔다. 그런데 사람이 나아지는 것은 ‘말’ 때문이 아니라 ‘관계’ 때문이었다.

<여자, 정혜>를 봤을 때 은희가 떠올랐다. 은희랑 정혜랑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는데도 그녀가 떠올랐다. 지금은 삼십대를 바라볼 은희가 그렇게 화장품 가게 모퉁이에서 혼자서 김치를 우적우적 먹고 라면 한컵으로 점심을 때울 것 같았다. 특히 영화 속에서 정혜가 ‘그 집 음식이 좋다’고 말하지 않고 ‘그 집 음식이 편하다’고 말을 할 때 이상한 전류가 내 몸속에 흘렀다. 세상엔 취향에 앞서 위험이나 안전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일상의 물결에 숨겨진 그 마지막 한 조각, 아주 작은 유리 알갱이를 알기 전에는 도저히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안다고 말하지 말라’는 제목의 영화를 본 건 수백개도 넘는다. 그러나 그때 이상하게도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태도였다. 이윤기 감독은 그 점에서 참 조심스러운 듯 보인다. 무심한 듯 흘러가는 한 여자의 외면을 파열시키는 기억, 떠오르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그 기억의 파도를 무던히도 세밀하게 그저 보여주려 든다. 아마 이윤기 감독이 <여자, 정혜>를 지금보다 훨씬 어수룩하게 품었어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은희는 자기가 예쁘다는 걸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뿐이었다. 그 계집애가 가진 건. 은희라는 이름. 여자라는 것.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은희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건 은희가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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