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는 세번의 총성으로 어그러졌다. 첫발은 안두희가 김구 선생에게 쏜 것이며, 두 번째는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쏜 총알이며, 세 번째는 광주에서 시민에게 쏜 총알이다. 이 상처를 안긴 이들이 뉘우치고, 상처를 입힌 자들과 입은 자들이 한을 풀어야 우리네 삶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연출가 오태석식 해석이다.
연극으로 어떻게 이 복잡하게 뒤엉킨 현대사의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을까. 극단 목화의 <천년의 수인(囚人)>은 연대가 다른 세 사건의 가해자를 한 병실로 몰아넣는다. 노테러리스트 안두희(강현식)와 광주에서 소녀를 쏜 뒤로 정신이 나간 계엄군 이등병(이명호), 빨치산으로 붙잡힌 비전향 장기수(김병철)가 병실에서 만나는 것이다. 엉뚱하다 싶은 사건들을 양손에 쥐고 세게 맞부딪히면 불꽃이 튄다. <자전거> <백마강 달밤에>류의 오태석 역사극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고, 만날 수 없는 이들이 만나는 충돌과 긴장이 극의 바퀴 노릇을 한다. 신명이 바퀴를 굴러가게 하고, 바퀴가 멈춰서는 지점은 해원의 굿판이다. 오태석의 상상력은 여기서 한번 더 관객의 마음을 격발시키는데, 이 총성들이 모두 타의에 의해 나왔다는 것이다. 저격은 있는데 저격의 배후가 없고, 발포는 있는데 발포 책임자는 없는 현대사를 관객은 재구성해보게 된다. 오태석은 관객으로 하여금 역사의 고난이도 체조를 시키지만, 따라가기만 하면 그 진진한 재미와 깊이는 오롯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번엔 오태석 연극답지 않게 신명과 웃음 대신 무거운 정조가 굿판을 떠돈다. 광주의 기억이 머지않기 때문이기도 하며, 병원에 진주한 헌병의 군홧발 소리(늘 배우들이 맨발인 오태석 연극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 때문에 병원이 다름 아닌 감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짓누르는 분위기를 오태석은 발랄하기 짝이 없는 음악과 효과음으로 반전시켜왔는데, 이번엔 비올라의 그을린 듯한 소리로 정조를 더 가라앉혔다. 2월12일 끝난 전작 <만파식적>에서 신명나는 분위기와 고적한 비올라 소리는 서로를 추어올렸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다. 장난기 가득한 마지막 반전의 충격이 이런 비감함 속에 파묻힐 수도 있다. 오태석 연극은 거저먹을 수 없다. 굿판에 직접 뛰어들어 춤도 춰봐야 떡도 더 맛있는 법이다. 만신창이가 된 환자들이 천진난만하게 시조 맞히기 놀이를 할 때 와락 흘러내리는 눈물은 떡과 함께 먹는 동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