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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1]

심장을 강타하는 백만불짜리 펀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스물다섯 번째 장편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감동의 펀치는 버티겠다고 마음먹은 정도를 뛰어넘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어려운 영화가 아닌데 철학이 있고, 대중영화인데 가볍지 않다. 영화에는 비유없이 한 세계가 들어 있다. ‘이스트우드주의’라는 조어를 만들어 그의 영화 세계를 정리해보고, 그것을 지표로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기를 권하고 있지만, 이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보던지 그건 상관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세다.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데뷔작으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를 연출하겠다고 말했을 때, 제작사 유니버설 영화사는 그렇다면 감독 급료를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탤론이, 즉 코만도나 람보가 연출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반색할 제작사는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기회를 얻었으니, 급료까지는 필요없다’고 여겼다. 그렇게 무시당하며 영화감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뒤, 일흔여섯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스물다섯 번째 장편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를 제안한다. 구식이라고 여겨 적잖이 난색을 표하는 제작사 워너 브러더스 간부들에게 그는 말한다. “이 작품이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서재에 꽂아놓는 데 자랑스러워할 만한 영화 한편을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오.” 그는 위대한 예술가의 위치에 서 있는 자신을 알고 있다.

리허설은 없고, 테이크도 두세번 이상은 가지 않는 제작 경제성으로, “액션”이라고 소리치는 대신 “좋아요, 준비되면 시작하세요”라고 말하고, “컷”이라고 외치는 대신 “좋아요, 그 정도면 된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배우들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연기지도로 유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미스틱 리버>에서 그와 함께 작업한 숀 펜은 “지금껏 만나본 미국의 우상 중 가장 실망시키지 않은 사람”이라고 그를 평했다. 도대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법자 캐릭터의 액션배우는 어떻게 이처럼 존경받는 노대가가 된 것인가? 어떻게 그의 영화는 그 긴 세월을 거쳐 철학을 얻게 된 것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는 ‘이스트우드주의’(Eastwoodism)라 불러도 무방할 만한 것들이 있다. 여기서는 바로 그 ‘주의’(ism)들을 상정해볼 것이고, 여러 다른 영화의 자세한 예를 끌어오는 대신 그것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듯한 역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소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왜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그의 최고작 반열에 올라야 하는지에 대한 호소이기도 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이스트우드식 장르주의

<용서받지 못한 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장르주의’자다. 대부분 서부영화나 범죄영화인 그의 스물다섯편의 장편영화 연출 목록이 그것을 말해준다(90년대 이후에는 거의 원작이 있는 범죄영화에만 매진하고 있다). 그 범주를 벗어나는 예외적인 경우라도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걸친다. 감독 데뷔 이후 얼마간, 그는 영화적 아이콘으로 자신을 키운 세르지오 레오네와 돈 시겔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평원의 무법자>는 자신이 출연하여 열풍을 일으킨 세르지오 레오네의 ‘이름없는 사나이 삼부작 또는 달러 삼부작’(한국에서는 흔히 무법자 시리즈로 불리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복습한 것이고, <써든 임팩트>는 돈 시겔의 영화 <더티 하리> 시리즈의 해리 칼라한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그러다가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은 예순이 넘어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를 선보이면서부터다. 이 영화는 <버드> <추악한 사냥꾼>으로 보여준 작가적 조짐을 뛰어넘어 그를 단숨에 거인의 위치로 격상시켰다. 영화가 나오자 평자들은 즉각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자신의 태생과도 같은 서부영화 장르의 신화적 궤적을 탈신화화하고 있으며, 지난날의 그가 맡았던 페르소나에 관해 ‘반성하는’ 인물을 등장시킨다고 지적했다. 옳은 지적이지만, 그러나 그건 너무 결정론적인 수긍이다. 서부극 장르 자체를 성찰적인 시각으로 관점화했다는 광의적 해석은 주목할 만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옛 자신의 페르소나의 폭력성을 회개하고 정화한다는 식의 주제를 새삼스럽게 영화 속에서 만들어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길 원한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그러나 나는 내가 했던 어떤 것도 뉘우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때는 장르로 돌아가는 시기였어요…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그 장르와 사랑에 빠진 거였지요. 내 생각에 그 작품이 내가 만들려고 했던 그 장르의 마지막이었거든요… 그건 운명 같은 거죠.”

요약하자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장르적 신화성을 깨는 데에만 온전하게 바쳐진 작품이 아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장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동원하면서 영화를 다른 성찰의 계기로 바꿔놓는다. 윌리엄 머니라는 늙은 총잡이의 행보가 한 인간으로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그렇다면 그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 죽었어야 했다), 그 반대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장르 안에 살고 있는 윌리엄 머니라는 총잡이에게 ‘이야기 이후의 현실’(서부의 총잡이는 착한 부인을 얻어 개과천선하였지만, 부인이 죽은 뒤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라는 설정에서 영화는 시작한다)이라는 환경에서 시작하게 한 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장르의 신화성을 다시 끼어들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윌리엄 머니는 예전의 흉포함으로 돌아가, 적들을 소탕하고 마을을 떠난다)을 감안해야 한다. 윌리엄 머니의 인간적 고뇌에 초점을 맞추었던 영화는 후반부 시퀀스에서 서부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그대로 동반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기를 선택한(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닌) 장르성을 중력처럼 받아들이면서 사유를 더해가는 것이다.

<미스틱 리버>, 고전주의적 집착

<미스틱 리버>

장르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은 그의 ‘고전주의’적 집착이다. <미스틱 리버>를 보고, “휴대폰만 없으면 현재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인지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말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 그의 영화는 유달리 고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그 고전성이란 도대체 무엇에서 나오는 것인가? 영화가 어떠해야 고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쯤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고전성을 설명하기 위해 존 포드, 라울 월시, 하워드 혹스, 존 휴스턴의 이름을 거명하는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서는 주제가 무엇인지가 실제로 중요하다.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으로 장면을 파고들 때 얻는 것이 많은 영화이다. 지각이나 인상을 다루기 때문에 주제가 무엇인지, 의미가 무엇인지 매달릴수록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모던한’ 영화들과는 상반된 차원의 것이다. 대구와 대응의 의미 구조들이 양산되고, 기승전결의 드라마 구조가 뚜렷해지고, 캐릭터들의 면면이 정확히 나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로지 극영화의 오래된 관습적 이음새만으로 인물들이 살고 있는 다른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영화적인 극적 관습을 깬 그 자리에 실험적인 무엇을 입지시키는 것이 아니며, 영화 일반의 규칙들을 배반한 자리에 양식적 과잉의 장치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영화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시등도 없고, 당신은 영화를 보고 있으니 환상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문도 없다. 대신, 스크린 속의 영화가 정말 현실이라고 믿도록 하는 ‘영화의 고전적 환상성’을 끝내 밀어붙여 그것을 관객의 감정 안으로 침투시켜 실현시키고야 마는 독창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고전주의란 그렇게 힘을 발휘한다.

<퍼펙트 월드>, 보수주의 혹은 가족주의

<퍼펙트 월드>

아마도 형식의 고전주의적 태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본래적인 ‘보수주의’적 기질과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보수주의라는 표현이 정치적으로 오해되지 않기를 진실로 빈다. 물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상에 관해 종종 누락되는 사실 한 가지가 있긴 하다. 그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단 한명의 공화당 지지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난생처음 투표를 했을 때부터” 공화당 지지자였고, 레이건 정부 시절에는 캘리포니아주 안에 있는 작은 시 카멜의 시장직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이력이 그의 영화적 세계를 흠집내는 구실로 악용될까봐 잘 거론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알고보면 그가 시장을 맡게 된 계기는 비교적 간단하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치적 행보로 가늠할 수 없는 것은 “레이건도 대통령을 하는데, 주 상원의원이나 주지사에 한번 출마해보라”는 주위의 권유를 그가 떨쳐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보수주의는 개인 내면의 원칙을 구성하는 기질이나 성향으로 이해될 수 있다(정치적 진보주의자 팀 로빈스는 결코 그의 영화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 내면적 기질이 지키는 보수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족주의’, ‘가장 책임주의’로서의 보수주의다. 그의 서부극 연출작 중 처음으로 자의식이 형성된 <무법자 조시 웨일즈>에서 주인공이 총을 드는 동기가 가족의 몰살에 기인하고, 그것이 대안가족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로 진전된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주인공 조시 웨일즈는 남북전쟁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고 무법자가 되지만 약자들과 한 무리를 지어 공동체를 만든 뒤 다시 떠난다). 그의 주인공들이 겪는 딜레마 중 빠지지 않는 것이 가정을 둘러싼 가장의 고민이다. 거기에 장르적인 요소들이 더해지면서 가족 관계는 깨진 것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양상으로 흐른다. “아내가 없거나, 이혼한 남자가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투쟁과 고난”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범죄영화 안에서 그 자신이 맡고 있는 거의 모든 역이 그렇다. 여기서 그의 보수주의란 아버지는 항상 착한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로 명확히 나눠져 있고, 가족은 서로 이용하는 가족과 서로 사랑하는 가족으로 구분된다는 인식에서 드러난다. 결국은 아버지의 자리와 가족의 결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간단하게는 <퍼펙트 월드>를 떠올리면 된다. 그래서 가장은 항상 어떤 결단을 요구받을 때가 있다. 그것이 결코 화합의 내러티브를 이끄는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언제나 거기서 진실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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