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로폼 뭉치가 전투기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리라 예상되었던 부분은 세트였다. <결전의 날…>은 대부분이 전투기 속과 지휘선에서 진행된다. 그린 스크린 앞에서 실사로 찍어 CG로 합성한다지만 전투기 내부를 위한 세트는 꼭 필요했다. 어설프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역시나) 그만한 돈도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수효과 전문회사인 ‘데몰리션’ 소속으로 <화산고>를 작업했던 문봉섭씨를 만났고, “SF 장르를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었다”는 그는 ‘데몰리션’의 김광수 팀장을 소개해주었다. 김광수 팀장은 “세트 만드는 공간과 인력과 노하우를 얻으려면 AI쪽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다시 ‘AI’의 오선교 대표에게 연락을 취했다. 한 다리 건너서 또 한 다리, 박선욱 감독은 지인과 지인을 통해서 해답을 얻었다. 그러나 ‘AI’팀이 박선욱 감독의 일을 도맡아서 한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갈 것은 명백했고, 오선교 대표는 “미사리에 있는 ‘AI’의 작업실과 장비들을 무료로 자유롭게 이용하면서 ‘AI’팀의 관리감독을 받아 직접 세트를 제작하는 것”을 제안했다. ‘AI’의 박병덕 세트제작실장과 김창환 디자인 감독이 박선욱 감독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폐공장에서 자재들을 사고, 청계천을 뒤지면서 스티로폼 덩어리와 파이프들을 사모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미술을 담당했던 신현무 감독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일류 인원들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의구심은 들었다. 과연 그들이 스티로폼을 쇳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 의구심은 싹 사라졌다. 청계천 스티로폼 덩어리들은 쇳덩어리가 되었다. 충무로 전문가들은 미다스의 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손길을 거친 CG
후반작업을 돕기로 나선 사람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CG를 담당했던 ‘In Frame’의 권순범 팀장이다.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설렁탕을 앞에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특수효과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 권순범 팀장이 전체적인 테크니컬 슈퍼바이저를 맡고, 그의 소개로 찾아온 ‘cinemeka’ 대표 김남식 팀장이 구체적인 작업들을 수행하는 체제가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박선욱 감독의 전작인 <REM>에서 CG를 맡았던 이종훈 팀장(TV 아동용 3D애니메이션 회사 ‘funny rain’ 소속)과 <Broken Morning>의 CG를 담당했던 이준영 팀장(<3D애니메이션의 모든 것> 저자)이 또다시 부름을 받고 찾아왔다.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일들을 하면서도 본격적인 SF영화에 대한 목마름을 가진 오랜 친구들이었다. “후반작업 부분은 모두 세부적으로 전문화되어 있다. 건물 하나를 영화 속에 만들어 넣더라도 맵핑, 합성 등 여러 사람들의 능력이 하나로 모여야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35mm 영화가 제대로 된 특수효과를 보여주려면 정말로 힘에 겨운 작업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솔직히 뽑을 거 다 뽑아먹고 술 한잔으로 때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웃음)
품앗이 덕에 완성된 감독의 꿈
충무로 스탭들의 품앗이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지만 생각만큼 수월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완벽주의자’인 박선욱 감독은 프로페셔널들을 모아놓고도 좀체 안심할 수가 없었다. “상업영화보다 좀 소홀하게 대하지는 않을지 처음에는 걱정도 좀 들더라. 감독들이란 원래 제작비가 500원이든 1억원이든 스탭들이 최선을 다해주기만을 바라지 않나.” 그래서인지 전문가들의 작업에 개입도 많이 했다. 간섭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줄여보려는 노력과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열망 때문이었다. 충무로 스탭들은 오히려 이를 반겼다. 그들은 제작사가 맡긴 대로 만들기만 하면 되는 상업영화보다도 감독과 창조적인 고민들을 나눌 수 있는 작업에 더 큰 재미를 느낀다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물론 좌절의 순간들도 종종 찾아왔다. 가장 큰 문제는 끌어모은 사람들의 스케줄을 한데 모으는 일이었다. “겨우겨우 모은 사람들이 일을 도와주다가 작업기간이 초과하면 가슴이 무너지곤 했다. 촬영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는 스탭의 고민이 다 자기 고민으로 변한다. 게다가 이들이 생계문제로 고민을 토로하면 내가 몹쓸 놈이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하루이틀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8개월을 대가없이 여기에 투자하라는 부탁을 누군들 선뜻 할 수 있겠나.” 그래도 사람들은 끝까지 남아주었다. “그분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았고, 나는 그 마음을 받았다. 고맙다고 이야기하면 ‘그런 말 하지 말고 작품이나 잘 완성해’라고들 한다. 그분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건 작품을 훌륭하게 만들어내는 일밖에 없다.”
<결전의 날…>은 CG 작업 완료 뒤 35mm로 사운드 믹싱까지 끝나게 되는 7월쯤에 지구에 안착하게 된다. 총제작비 5천만원. 프리프로덕션에서부터 촬영종료까지 10개월이 걸렸고 후반작업에도 그만큼의 시간과 공이 투여되고 있다. 박선욱 감독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면 해낼 수 있다”는 무모한 듯한 자기확신과 “스스로를 테스트하는 듯한 난관마다 비치는 아련한 빛을 좇아서” 여기까지 왔다. 여름 내내 청계천을 뒤지며 세트 제작을 도와준 사람들, 작업실을 무료로 대여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충무로의 전문가들, 감독의 꿈을 믿고 묵묵히 대가없이 일해준 소중한 스탭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이 돈보다 더 큰 재산’이라는 낡고 문드러진 믿음은 지금 충무로의 변방에서 조용히 한 남자의 꿈을 완성시켜나가고 있다.
참여한 주요 ‘품앗이’ 스탭들
분장팀장 이창만(<알포인트> <레드아이> <범죄의 재구성> 등) / 세트 제작, 디자인 감독, 제작 지원 박병덕, 김창완, 오선교(‘AI’ 소속· <태극기 휘날리며> <내츄럴시티> <청연> 등) / 제작 지원 김광수(‘데몰리션’ 소속·<청연>) / 세트데커레이션 신현무(<동해물과 백두산이>) / 데크니컬 슈퍼바이저 권순범(‘In Frame’ 소속·<태극기 휘날리며> <아라한 장풍대작전>) / 특수의상 김재형(특수의상전문 ‘J House’) / 2D 및 이펙트 김남식(‘Cinemeka’ 소속·<태극기 휘날리며> <아라한 장풍대작전>) / 3D 이준영(‘Dodream’ 소속·광주국제영화제 트레일러·<3D애니메이션의 모든 것> 저자) 이종훈(‘Funny Rain’ 소속·<제5 빙하기> <EBS 리아의 수학놀이> <라그하임> 게임 비주얼) / 특수효과·제작 지원 문봉섭(<화산고> <2009 로스트 메모리즈> 특수효과팀) / 촬영감독 장현모(CF 촬영감독·현재 디지털장편 <과자로 만든 집> 촬영 중) / 조명감독 박노섭(CF 및 드라마, 뮤직비디오, 영화 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