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이 다시 뜨고 있다. 시트콤 부활을 향한 힘겨운 몸부림의 결과다.
최근 한국 시트콤은 위기였다. 90년대 <남자 셋 여자 셋> <순풍 산부인과> 등이 빚어낸 시트콤 전성기 이래 ‘시트콤의 잔치’는 끝났다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소재가 떨어지고 새 아이디어도 부족했을 뿐더러 휘황한 대작 드라마들과 톡톡 튀는 스탠딩 코미디 프로그램들 틈새에서 힘을 쓰지 못한 터다. 수차례 새로운 소재와 설정으로 시트콤 변화가 시도됐으나 역부족이었다. 지난해 시추에이션 콩트를 표방했던 한국방송 <방방>부터, 시간 이동이라는 설정을 들고 나온 문화방송 <조선에서 왔소이다>, ‘빙의’를 소재로 한 에스비에스 <혼자가 아니야>가 낮은 시청률로 조기종영됐다.
그러나 새로운 빛은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한국방송 일일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나 문화방송과 에스비에스의 주간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 <귀엽거나 미치거나>가 꾸준히 10% 안팎의 시청률을 유지하며 나름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 성공 문법은 제 각각이다. 드라마 형식이 대폭 도입되기도 했고, 외국 시트콤을 한국에 맞게 벤치마킹한 것도 성공적이었다. ‘극단적으로’ 독특한 소재가 마니아를 불러 모으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시트콤 부활의 길은 끊임없는 변화에서 열리고 있다. 변화의 방향에 따라 시청자층이 나뉘고 있는 것도 필연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뒤에는 ‘피디의 힘’이 있다.
김석윤표 ‘올드미스 다이어리’
세밀한 심리묘사
지난해 11월 시작한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주된 이야깃거리는 ‘일’과 ‘일상’이다. 31살 전문직 ‘노처녀’들의 일상이 그들의 직업 이야기와 버무려져 담담하게 펼쳐진다. 일과 일상의 강조는 기존 시트콤과의 차별화로 이어지고, 과장된 말투와 움직임으로 웃음을 자아내던 기존 시트콤과 달리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캐릭터의 감정과 대사가 세밀하게 묘사된다. 이를 위해 인물 구성은 미국 시트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설정은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차용했다. 한국 시트콤의 주류였던 홈 시트콤을 탈피해 여성 시트콤을 표방한 것도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특징이다. 이런 특성들은 특히 20~30대 여성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현실의 자기 모습을 시트콤 인물과 견주며 일정 부분 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담담하고 세밀한 인물의 심리 묘사 덕에 감정이입에까지 이르지 않는 것은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특징은 연출자 김석윤 피디의 전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방송국 피디들이 등장했던 <멋진 친구들>은 피디라는 직업적 특성으로 재미를 살리면서 동시에 젊은이들의 사랑이라는 소재로 보편성까지 담아냈고, <달려라 울엄마>에서는 40~50대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엮어냈다.
다만,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변화하는 여성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시대에 역행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까닭이다. 전형적인 남녀관계를 꼬집는 듯하지만, ‘노처녀’들의 궁극적 문제 해결책이 ‘결혼’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김 피디는 “여성 캐릭터들은 요즘 여성들의 특징을 배분해 만든 것”이라고 반박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과 아쉬움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3명의 독신 ‘할머니’가 <올드미스 다이어리>에 등장한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노도철표 ‘안녕, 프란체스카’
조롱과 해학
문화방송 <안녕, 프란체스카>는 시트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루마니아 출신 흡혈귀들이 한국을 찾았다는 설정부터 기발하다. 인간 아닌 존재가 바라본 인간 세상은 몹시 부조리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남의 피를 빨아먹어야 사는 흡혈귀와 이들이 꾸린 가족이라는 설정은 한국적 가족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풍자하기에 적절하다. 해체돼 가고 있는 가족과 한국의 배타적 문화로 힘겨운 부적응자들의 모습은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끊임없이 웃음거리로 등장한다. 조롱과 해학과 풍자와 비판이 뒤섞여 시청자들을 웃게 하고, 한편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홈 시트콤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판타지’가 끼어들면서 기존 홈 시트콤의 정반대 구실을 하기도 한다. 가족에 대한 옹호 일색이었던 홈 시트콤이 가족이라는 억압을 비판하는 도구로 뒤집혀 버린 것이다. 여기에 날카롭고 무표정한 심혜진과 둔하면서도 불쌍해보이는 이두일 등 출연자들의 ‘엽기적 연기’도 한몫 거들면서 ‘프란체 폐인’이라는 마니아들이 등장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안녕, 프란체스카>는 연출자 노도철 피디의 온갖 개인기가 모두 녹아든 시트콤이다. 노 피디의 특장은 <두근두근 체인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으면 미인으로 변하는 마법샴푸를 도입해 한국적 외모 지상주의를 신랄하게 꼬집었던 것. 못 생긴 주인공 모두(조정린)가 위급한 상황에서 마법의 샴푸를 사용해 요정(정시아)로 변신하는 대목은 만화적 상상력의 응용이었으며, 이는 기존 시트콤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기도 했다.
시트콤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에도 노 피디는 재미와 의미를 모두 따지던 연출자였다. 그는 불우이웃 돕기와 콘서트를 결합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게릴라 콘서트’를 연출했으며, 요즘도 공익적 오락프로그램으로 사랑받는 에서 청소년들의 여러 문제들을 사회적 이슈로 제기한 ‘하자 하자’의 연출자이기도 했다.
김병욱표 ‘귀엽거나 미치거나’
톡톡튀는 캐릭터
지난 1일 시작한 에스비에스 새 시트콤 <귀엽거나 미치거나>는 박경림, 소유진 두 배우의 연기 변신으로도 주목받았지만, 무엇보다 김병욱 피디가 오랜만에 연출자로 나섰다는 점도 큰 관심거리였다. 김 피디는 1995년 <엘에이 아리랑>으로 시트콤의 새 장을 열었고, 그 뒤에도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 등 한국 시트콤의 대표작들을 줄줄이 엮어낸 최고의 피디다.
김 피디의 특기는 무엇보다 절묘한 캐스팅에 있다. 송혜교, 이창훈 등이 그의 시트콤을 거쳐 연기자로 성장했고, 오지명, 신구, 박영규, 선우용녀 등 중견 연기자들도 시트콤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어딘지 궁상맞고 어리버리하며 때로 치사하기까지 한 캐릭터들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있다. 그 캐릭터들은 또 하나같이 우리 주변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특징을 사실적으로 포착해 재미나게 비틀어낸 것이었다. 처가살이하며 뻔뻔함과 쪼잔함이 생존전략이었던 박영규, 권위적이고 다혈질인 산부인과 원장 오지명 등의 캐릭터는 <순풍 산부인과> 종영 뒤 6~7년이 지난 지금도 쇼 프로그램 등에서 끊임없이 되새김질 되며 많은 이들을 웃기고 있다. 이번 <귀엽거나 미치거나>도 김 피디의 특기가 그대로 이어진다. 박경림과 소유진은 본래 이미지를 뒤틀었다. 박경림은 외모 빼고 모든 것을 갖추고, 소유진은 외모 밖에 아무 것도 없는 캐릭터로 연기 변신했다.
그의 본래 특기에 더해 본격적으로 인기 드라마를 패러디했다는 것이 새롭다. <발리에서 생긴 일>이나 <파리의 연인>을 뒤집어 웃음을 만들어낸다. 드라마에서 질리도록 나오는 재벌2세와 신데렐라라는 비현실적 설정을 가볍게 꼬집고 비트는 작업을 통해 폭소를 자아낸다. ‘시트콤의 귀재’로 불려온 김 피디가 만드는 본격 블랙 코미디. <귀엽거나 미치거나>의 성공 여부는 한국 시트콤 ‘제2의 전성기’가 열리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 잣대인 셈이어서, 많은 눈길이 쏠리고 있다.
시트콤은 ‘변신의 장’
정통 연기자가 푼수로 코믹연기자는 근엄하게 기존이미지 뒤엎는 재미
요즘 시트콤 출연자들 면면을 보면, 뜻밖이다 싶은 이가 많다. <안녕, 프란체스카>의 심혜진, 려원, ‘켠’이나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예지원, 김지영, 오윤아, 김영옥, 한영숙, 김혜옥, <귀엽거나 미치거나>의 소유진, 김성원, 김수미 등이 그렇다.
연기자들에게 이미지 변신은 매우 중요하지만, 시트콤을 통해 획기적인 변신을 꾀하는 흐름이 이처럼 대세를 이룬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순풍 산부인과>에서 오지명, 선우용녀, 박영규 등이 코믹 연기로 변신에 성공한 일이 작은 물줄기를 이룬 뒤의 일이다. 연기자에겐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연기 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되고, 이를 통해 시트콤은 많은 이들에게 폭소를 선사하니 일석이조다.
20년 가까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정통 연기만 해온 심혜진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생머리를 늘어뜨린 채 무표정하게 눈을 반짝이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의외성으로 다가간다. <귀엽거나 미치거나>의 김성원은 <파리의 연인>의 근엄한 대기업 회장의 캐릭터를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숨겨져 있었음직한 감정을 그대로 표출해, 이를테면 박경림에게 네모난 얼굴을 깎으라는 식으로 말을 해, 웃음을 터뜨린다. 주로 영화에서 섹시 이미지로 연기가 한정됐던 예지원도 <올드미스 다이어리>에서 솔직하면서도 푼수끼 다분한 ‘노처녀’로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젊고 발랄하고 ‘여우’ 같은 배역을 주로 맡아온 소유진이 <귀엽거나 미치거나>에서 둔하고 미련한 ‘곰’으로 출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듯한 이미지를 망가뜨려 웃음을 자아내는 방식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즘엔 거꾸로 코믹한 이미지의 연기자에게 근엄하거나 반듯한 캐릭터를 적용해 웃기는 방식도 사용된다. 박경림이 <귀엽거나 미치거나>에서 똑똑한 큐레이터로 등장하고, 조정린이 <두근두근 체인지>에서 착하고 귀여운 캐릭터로 나온 것 등이 그렇다. “박경림이 투피스 정장을 입고 명화에 대해 유창하게 설명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는 것이 김병욱 피디의 설명이다.
연예인들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고 장르 간 경계가 사라지면서 경쟁은 한층 치열해지는 터라, 연기자들의 시트콤 출연 대열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