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Enjoy TV > TV 가이드
기부할 권리, 알 권리
2001-07-05

ARS 모금의 불투명한 감사, 회계시스템

때가 때이니만큼 비얘기로 시작해야겠다. 농토도 모자라 농심(農心)까지 바짝 태우던 가뭄이 해갈되는가 싶더니 또 수해소식이 달려왔다. 하늘의 심중을 헤아릴 길이 없어 늘 허둥대는 우리의 모습이 딱하기만 하다. 정부는 올해도 ‘역시나’ 긴급성 재해대책을 꾸리느라 분주한데, ‘100년 만의 가뭄’이니 ‘5년 주기의 한국 가뭄과 10년 주기의 아시아 가뭄이 맞물린 살인적인 가뭄’이니 하는 숨막히는 뉴스 뒤에 성금소식 역시 빠질 수 없다. 사실 요즘같은 때야 ‘성금의 계절’이 따로 없다. 그야말로 시도 때도 구분하지 않는 성금폭격에 국민들 쌈짓돈이 숫제 ‘준 공금’이 된 듯 하다. 가만히 헤아려보면 고놈의 편리한 ‘ARS’(Automatic Response System)가 톡톡히 한몫한다. 은행에 가서 계좌이체를 하거나 직접 언론사를 방문해 모금함을 채우는 번거로움이, 성금에 동참하지 못하는 양심의 괴로움과 비긴다면 비약일까. 이럴 때, 발끝의 전화기를 집어드는 편리함과 초단위로 성금액수가 올라가는 화면 앞에서 한몫 거들고 싶어지는 게 당신 혼자뿐이랴. 게다가 한정된 기회(1회)와 한정된 액수(1천원)는 당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주머니까지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지난 6월8일부터 23일까지 방송협회와 신문협회가 주관하여 46개 신문사와 32개 방송사에서 실시한 ‘양수기를 보냅시다’ 모금운동에서 전체 모금액 140여억원 가운데 5%인 7억여원 정도가 ARS(700-1004)를 통해 모금됐다. 7억원 가운데 실제 거둘 수 있는 액수는 70∼80%인 5억여원에 불과하다.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한편으론 어린이들의 장난전화를 방지하기 위해 전화 1대당 1통화로 제한한 덕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도 최종입금되는 돈은 1천원이다. 따라서 텔레비전 화면에서 올라가는 액수와 실제 입금액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성금액이 함께 부과되는 전화료 자체가 체납되는 경우도 많아서 액면 그대로의 액수를 기대하긴 힘들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렇게 모아진 돈들은 일단 재해성금으로 분류되어 행자부 관할 전국재해대책본부로 송금된 뒤, 알려졌다시피 200곳의 암반 관정과 4천여대의 양수기를 구입하는 데 쓴다는 계획이었다. 전화료 고지서가 발부되고 전화료가 납부되기까지 두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당장 시급한 돈은 정부에서 미리 지급하고 모아진 성금으로 갚는 방식을 채택했단다.

현재 우리나라 모금법(정식 명칭은 기부금품모집법)은 모금행위의 목적을 크게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 안에서 가뭄과 같은 재난 구휼사업은 행자부 관할로, 불우이웃돕기 등의 자선사업은 보건복지부 산하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의 관할로 나뉘어 있다. 이번에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모은 성금의 수령자는 행자부 소속의 재해대책협의회였다. KBS1TV <사랑의 리퀘스트>(한상길 연출 700-0600)나 EBS <효도우미>(서준 연출 700-0700)을 통해 모인 성금은 공동모금회의 관리를 거치게 된다. 성금의 관리처가 나뉘다보니 감사도 제각각이다. <사랑의 리퀘스트>의 경우 방송 한회(50분 분량)당 모금액수가 1억원이 넘고 지난 3년간 약 200억원의 성금이 모였지만, 한달에 한번 열리는 후원금 운영위원회(위원장 한국복지재단 회장 이하 11명)에서 후원금 지원방법에 대한 심의와 수혜자 결정만이 이뤄질 뿐 체계적인 회계감사는 아직 못하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밝혔다. 재해성금의 운영체계는 좀더 복잡하다. 행자부에서 거둬들인 재해성금은 기획예산처로 넘어가 재해대책기금 예산안에 포함되며, 다시 양수기 구입을 위해 농림부로 넘어간다. 이번 ‘양수기를 보냅시다’ 모금운동의 경우, 행자부의 공문 요청으로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앞장서긴 했지만, 일부 언론사에서 따로 모금접수창구를 만들어 사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추문이 돌기도 했다.

모금이 종료된 6월23일은 장마가 시작된 시점이다. 농림부는 18일 양수기를 1차 지급했다. 17일부터 3일동안 내린 비로 가뭄지역의 해갈이 얼추 이루어졌다니까, 가뭄에 시달린 농민들이 참으로 고마워하기 어렵게 됐다. 뒤이어 이른 수마가 농가를 덮쳐 이번엔 당장 수해기금을 모았어야 했나. 성금을 낸 국민들도 허탈해질 일이다.

얼마 전 각국 국민들의 기부문화에 대한 한 조사연구결과가 발표됐다. 미국 국민 한 사람의 한해 평균기부금 액수는 600달러, 우리돈으로 약 80만원가량이다. 한국은 10만원이 조금 못 미치는 액수였다. 사실 한국사람들처럼 성금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국민이 또 있을까. 딴죽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역시 한국사람은…” 하는 투로 혀를 차는 해설에 동의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우리’가 기특하고 대견하다고나 할까, 너무 순박하다고나 할까. 제 구실도 못하는 성금을 꼬박꼬박 불입하는 일을 해마다, 철마다 되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또 텔레비전 화면에 ARS 모금번호가 뜬다. 전화번호를 다시 누를까.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 떠오르는 생각. 성금접수창구의 단일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모인 돈이 제 값을 할 수 있도록 제 때, 제곳에 쓰여야 한다. 시민단체와 민간인들도 참여할 수만 있다면 운영위원으로 동석해 돈의 쓰임새를 논할 수 있었으면 한다. 모인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전화 다이얼을 누르는 국민이 상세히 알아야 한다. 좀더 투명해져야 한다.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