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영화, 휴전선을 넘다
영화 <간큰 가족>의 제작사인 두사부필름으로부터 북한 촬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겨우 한달 전이었다. <간큰 가족>은 간암 말기의 실향민 김 노인(신구)을 위해 ‘통일 자작극’을 벌이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큰아들 부부(감우성, 이칸희)와 삼류 에로영화 감독인 둘째아들(김수로), 북에 두고 온 전처를 그리워하는 남편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김 노인의 부인(김수미)이 선의를 위한 거짓말을 거듭하며 달려가는 <간큰가족>은 소박한 이상주의자들의 소동극이라 할 만하다. 생각해보면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했다. 간이 큰 가족의 간 큰 이야기 아닌가. 한국영화 최초로 북한 로케이션을 감행한 사건의 이면에는 간 큰 제작사의 배포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훌쩍 180여명의 스탭, 배우, 기자단들과 섞여서 떠난 2박3일간의 여정. 그것을 담은 이 짧은 기행문은 철책선을 넘나들며 기록한 작은 삽화들의 모음이다.
2월21일 월요일 오후
“북한군 동무들 움메 기죽어”
버스가 미끄러지듯이 비무장지대로 들어섰다. 그 순간 끈적한 침이 긴장된 목구멍 속으로 꿀꺽하고 넘어갔다. 2월21일 3시. 냉기가 서린 화창한 날의 오후였다. 연녹색의 철조망이 끝없이 도로와 대지를 구분하며 이어졌다. 파블로 네루다였다면 “영원하게 뻗은 철조망으로 둘러진 나의 조국” 운운하며 제법 근사한 대사를 하나 쳤을 것이다. 솔직히 그런 건 아무나 잡을 수 있는 폼이 아니다. 두명의 북한군 동무들이 검색을 위해 버스 안으로 들어와 승객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훑어보고 지나가는 순간에 시 구절을 읊을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은 시인인 동시에 대단한 담력의 소유자여야만 한다. 2박3일간 제멋대로의 기자들을 통솔하게 될 가이드가 “군인들이 버스에 올라탔을 때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거나 하지는 마세요. 그래도 너무 긴장하지는 마시구요”라고 일렀거늘, 막상 그들이 특유의 (관절에 무리가 올 것이 분명한) 걸음걸이로 들어서는 순간에는 오줌을 지릴 정도로 긴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북한 촬영이 성사되기까지
제작사인 두사부 필름이 촬영 기획안을 가지고 현대아산을 통해 북한과 접촉을 시도했던 것은 작년 9월말이었다. 조명남 감독은 촬영 초기에 북한 로케이션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누군들 가능하리라 생각했으랴. 현대아산측은 마지막까지 “가고 안 가고는 당신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되고 안 되고를 섣부르게 말할 수는 없으니 강하게 판단하라”고 조언했다. 자칫하면 엎어져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제작진은 작년 11월15일에 마침내 북한에 입국해 장소 헌팅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상황은 그리 여의치가 않았다. 관광객에게 열려 있지 않은 장소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금지되었다. 시나리오도 북한측에 공개할 수 없었다. 북한측이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소재를 불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산가족 상봉 자체를 꺼려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산가족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를 지니고 있지 않은 그들로서는 제대로 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기에 국가적인 능력의 부족함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를 공개하지 않고서 어떻게 영화 촬영이 가능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현대아산쪽의 도움이 컸다. “광고효과 같은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익은 바라지 않으며 앞으로 물꼬를 트는데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 같아 지원한다”는 현대아산은 북한당국을 달래서 시나리오 없이도 영화 촬영이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오랜 기간 북한당국과 현대아산간에 쌓아왔던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가운데 북한이 핵무기 보유선언을 했다. 그동안 노력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촬영은 또다시 금지되었고 두사부 필름은 피를 말리고 있었다. 겨우겨우 촬영 허가가 떨어진 것은 예정된 입국일로부터 겨우 이틀 전 저녁 7시였다. 짐을 꾸리던 기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고 있었던 일이다.
“하루이틀 장사합네까. 저도 압네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설산의 풍경에 넋을 잃었다. 100여 미터마다 정자세로 서서 버스를 지켜보던 북한군 동무들이 아니었더라면 줌을 최대한 끌어당겨 보이는 것 모두를 카메라 속 JPG 파일로 전환했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붉은 깃발이 들려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천진난만한 남한 관광객 동무가 카메라를 꺼내어 드는 순간, 그들의 우람한 팔뚝은 붉은 깃발을 힘차게 좌우로 흔들게 될 것이다. 가이드의 말대로 “꿈에 그리던 동포와의 단독 면담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제작사로부터 미리 받은 ‘유의사항’에도 친절하게 쓰여 있었다. 촬영금지 지역이나 대상을 촬영할 경우 미화 50달러 벌금과 카메라 압수(!) 출장비와 카메라 값을 대차대조해 보니 무참한 손해였다. 동포와의 단독 면담이야 기자로서는 꿈에 그리는 이상적 기삿거리겠으나 50달러의 벌금과 빼앗긴 카메라는 누가 보상해 줄 것이냐. 한동안 금강산 관광은 ‘하지 마 관광’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다. “사진 찍지 마.” “말조심 해.” “저기로는 가지 마.”그래도 남한의 철없는 관광객에 익숙해진 지금은 그런 제약들이 슬그머니 덜해지고 있는 중이다. 검문소에서 남한 기자들의 카메라를 조사하는 군인에게 가이드가 “이미 검사받은 카메라예요”라고 하자 군인 동무, 씨익 웃으며 말한다. “하루이틀 장사합네까. 저도 압네다.”
30분여를 차로 달려 도착한 곳은 고성항에 정박해 있는 ‘해상 호텔 해금강’이었다. 고성항은 내륙으로 들어와 있는 천혜의 내항으로 바다 옆에 솟아 있는 금강산 봉우리들의 절경이 숨을 가쁘게 만든다. 공항 입국장과도 유사한 검문소에서 입국 스탬프를 받아들고 호텔로 향했다. 금강산 관광특구의 밤은 새카만 어둠이다. 냉장고에서 ‘금강산 샘물’ 한병을 꺼내 단숨에 마셔 버리고 작은 기대감에 들떠서 TV를 틀었다. 북한 방송을 볼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더니 무채색 옷을 입은 무표정한 여자가 반긴다. 오, 안녕. 프란체스카! 여기는 북한 속의 남한이다.
배우 4인의 북한 첫 촬영 소감
“북한도 제주도에 촬영하러 오면 좋겠다”
둘쨋날의 촬영이 끝나고 출연배우들과의 자그마한 공동 인터뷰가 있었다. 촬영의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북한에서의 첫 촬영이라는 데 적지 않은 흥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한국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에서 촬영하는 소감을 들어보았다.
=신구 | 처음 비무장 지대를 지나서 북한 땅으로 들어오는 순간에 만감이 교차했다. 마을 주민들이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데, 소주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젠 평양이나 묘향산에서도 촬영하고, 북한영화도 제주도에 촬영하러 오면 좋겠다. <간큰가족>을 계기로 물꼬가 트기를 바란다. 이렇게 영화촬영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양쪽이 많이 여유로워진 때문이라 생각한다.
=감우성 | 금강산에는 땅 보러 왔다. (웃음)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 첫 영화라 정말 영광이다. 하지만 조금 씁쓸하기도 하다. 전쟁을 겪으신 어르신들과 있으니 약소민족의 서러움 같은 것도 느껴지고. 사실 눈으로는 볼 수 있으나 마음까지 느껴지는 단계는 아니다. 어쨌든 철조망 안에 갇혀서 촬영하는 것이므로 묘한 긴장감과 냉기가 여전히 느껴진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안 좋기도 하다. 특수한 상황에 있는 후손들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저 북한에 온다는 것만으로 즐겁기만 했던 기분에 경각심이 들었다. 현실을 조금 더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수로 | 처음 든 생각이 이런 거였다. 김정일 위원장과 고위 간부들도 모두 <간큰가족>을 보겠구나! 이젠 김수로라는 배우를 잘 알게 되겠구나! (웃음) 영광스럽고 긴장도 많이 된다. 최초로 북한에서 촬영을 하게 된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기쁘다. 예전에 TV에서 이산가족찾기를 본 이후로는 남북의 아픔을 피부로 느낄 기회가 없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분들의 아픔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칸희 | 북한으로 처음 들어올 때, 철조망 너머로 조그마한 아이가 가방이랑 나무 봇짐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 나도 8살짜리 아이가 있는데, 가슴이 순간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 와보니 저절로 그런 찡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한 동포라 역시 멀리 있어도 한국 사람이구나 싶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