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펄이 작은 미생물, 어패류들이 살자고 내어놓은 길을 따라 숨을 쉬듯, 도시는 골목길로 숨을 쉰다. 대학로의 주도로들을 선점하고 있는 각종 호화 상가류들 저 너머에도 작은 골목들이 주택가에 연해 잎맥처럼 퍼져 있다. 그 잎맥 사이사이로 장사에는 별반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음식점도 있고, 찻집도 있지만, 굳이 어떤 목적을 정하지 않고 짤막짤막한 대학로 뒤편 골목길을 거닐어보는 것도 대학로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여행이다. 이렇게 골목 사이, 혹은 대학로 변두리를 거닐다 발견한 대학로에 얽힌 일곱 가지 비밀 이야기. 알다시피, 비밀이니까 비밀을 지키는 것이 비밀을 밝힌 사람에 대한 비밀을 들은 사람의 비밀스런 의무. 이 아이러니한 의무에 따라 여기 대학로의 일곱 가지 비밀을 풀어놓는다.
비밀 하나. 대학로 박물관들
낡은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보니 짚더미 위에서 로봇이 춤추네
박물관은 공간 위에 펼쳐놓은 그림책이다. 공연장에서, 극장에서 조율되고 편집된 작품을 앉은자리에서 감상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두리번두리번 어정거리며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은 만큼 보거나 관심 안 가는 것은 대충대충 지나가보는 쾌감에 목마른 자들이여, 대학로에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는지는 몰라도 대학로에도 작고 독특한 박물관, 사실은 있다.
▶ 쇳대박물관 방송통신대학 뒷골목에를 이르자 주택가가 시작되는 경계에 심상치 않은 건물이 우뚝하다. 건물 외벽에 온통 시뻘건 녹물이 흘러내린 것이 석양을 받아 불타는 양이다. 여기는 쇳대박물관. 장승 곁에서 마을 어귀를 고즈넉하게 지켰다는 ‘솟대’와는 아무 상관없다. 백석지기네 곳간 문을 고즈넉하게 지켰으면 몰라. ‘쇳대’는 열쇠의 방언을 뜻하는 바이며, 그러한즉, 이 박물관에서는 열쇠, 자물쇠 등 고랫적 잠금쇠부터 먼 나라 자물통까지 희한한 구경을 일삼아 할 수 있겠다. <미래소년 코난>이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 나오는 무쇠들의 절대 괴감에 마음 빼앗겨본 적 있는 이들이면, 실핀 하나로 찰칵찰칵 문 따는 영화 속 전문가들의 솜씨를 한번쯤 흉내내본 이들이라면, 작은 박물관의 300여점의 전시물 하나하나 상서롭게 보아 넘기지 않을 터이다.
이로재의 승효상 건축가 작품인 건물 4층에 올라서면 상설전시관이 있다. 우리나라 자물쇠의 유 있는 기본 형태 ㄷ자형 자물쇠, 원통형 자물쇠, ㄷ자형 자물쇠의 변형인 배꼽 자물쇠 혹은 함박형 자물쇠와 함께, 마치 실제 대문에 햇살 받고 있듯이 자연광 아래 전시되어 있는 ‘빗장’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장식용 열쇠고리인 각종 열쇠패, 푸른 녹이 녹녹히 내려앉은 통일신라시대 자물쇠부터 열쇠가 있어도 주인이 아니면 열 수 없었다는 비밀 자물쇠, 열쇠구멍 하나 없는 데도 주인 아니면 열 수 없었다는 앉은뱅이 책상 ‘연상’까지 다양한 열쇠와 잠금장치의 역사를 볼 수 있다.
▶ 짚풀생활사박물관 청담동에 있다가 대학로로 이사온 지 이제 5년에 접어든 짚풀생활사박물관에는, 짚과 풀과 손만 있으면 집도 지어올리고 옷도 꼬아 입었던 한반도 옛적 어르신들의 손재주가 가득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맞아주는 어린아이만한 도깨비 한쌍을 시작으로, 양반 광대놀이 사자탈이니, 징을 두드리던 채, 돼지오줌보와 함께 굴려 놀던 짚공, 상주가 상 동안 옆으로 누워 자는 새우잠에 팔베개 대신 사용했던 짚베개 고침, 문소리 완충장치로 문 뒤에 걸어두었던 문초리 등등 짚의 용도와 사소한 필요에 따른 앙증맞은 소품들에서 풍기는 재치가 헤아리기 숨차다.
▶ 로봇박물관 붉은 쇠와 노릇노릇한 짚세기로 눈이 심심해질 쯤, 로봇박물관에 들어서면 알록달록한 로봇 앤티크 오브제들로 동공은 좁아지고 눈동자가 바빠지기 시작한다. 인류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황금율의 발견과 잔다르크의 출현- 섹시로봇 ‘마리아’에게 영감을 줬다 하여- 을 로봇의 역사로 포용해버리는 놀라운 흡수력을 보여주는 로봇발전사 연표, 로보트 태권V가 마징가Z의 모작이라면, 미키마우스와 슈퍼맨의 혼합 모방작품이라는 아톰은 무엇이더냐, 식의 저돌적인 주장까지. 2층 1전시실을 지나 3층 2전시실에 이르면 ‘로봇과 디자인’라는 코너에 이른다. 1760년대 신고전주의가 외계인을 연상하는 그림으로 로봇에 관한 최초의 상을 제시했으며 이어 큐비즘, 아르데코, 팝아트, 현대미술이 로봇을 디자인하는 데 강한 영감을 제시했음을 보여준다. 로봇 오브제뿐만 아니라 <오즈의 마법사> 초판본, 각종 로봇 관련 상품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배트맨 철제 도시락, 손오공 스타봉, 아톰 퍼즐과 같이 추억의 때가 덕지덕지 앉은 물건들도 함께 있어, 첨단 기술의 산물 로봇이 어릴 적 내 가장 좋은 친구였던 건담과 실은 형제일 수 있음을 깨우친다. 실제로 로봇을 원격조정해볼 수 있는 체험장과 3D 입체영사실도 있다.
▶ 쇳대박물관 |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 휴관) 관람료 일반 5천원, 청소년 3천원, 어린이 2천원 문의 ☎02-766-6494, www.lockmuseum.org
▶ 집풀생활사박물관 |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월요일 휴관) 관람료 일반 3천원, 어린이·청소년·노인 2천원 문의 ☎02-743-8787∼8, www.zipul.com
▶ 로봇박물관 | 관람시간 오전 10시∼저녁 8시 관람료 일반 8천원, 어린이 5천원 문의 ☎ 02-741-8861∼2, www.robotmuseum.co.kr
비밀 둘. 필리핀 장터
혜화동 로터리에 서면 필리핀이 보인다
일요일 오후, 혜화동 로터리 동성중·고등학교에서 혜화동 성당쪽으로 난 길이 북적인다.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으로 이국적이다. 가톨릭이 주교인 필리핀 사람들이 혜화동 성당에 미사를 드리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국내 외국인 중 중국, 미국, 대만, 일본에 이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미사를 끝내고 나온 이들이 자연스레 정보와 물건과 인사를 주고받는 새에 장터가 생겨났다.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이 장터는 처음 몇개의 좌판이 고작이었으나, 이제는 100여 미터 보도에 트럭 스무대 가량이 진을 치고 제법 시장 모양새를 갖춰간다. 화장품, 샴푸, 조미료, 향료, 소스, 코코넛 등 생활잡화와 과일 야채류, 필리핀에서 잡아들인 생선류와 필리핀에서 인기있는 드라마, 영화 DVD 등 다양한 품목이 고향 떠난 삶들의 향수를 달랜다. 필리핀 아내 덕에 이 장터와 인연이 닿았다는 한국인 서진수씨는 “망고 같은 열대과일이 알려지면서 그걸 찾는 한국 사람이 많아졌죠. 필리핀 음식이요? 필리핀이 영국식민지였기 때문에 음식이 우리보다 훨씬 서구화되었거든요. 한국 사람에게는 좀 독특할 수 있지요”라며 국제 전화카드를 파는 손을 바쁘게 놀린다.
장터는 역시 군것질과 요깃거리가 흥을 돋운다. 쌀국수 2인분에 필리핀식 떡 한줄을 얹어 3500원, 타호라는 연두부를 컵에 담아 500원, 그외에 스프링롤, 튀김, 찹쌀 빵과 떡, 바비큐 등 입맛따라 취향따라 이국적인 군것질을 시도해보자. 필리핀 상인들과 흥정을 해보아도 좋다. 영어만 된다면 누가 말린단 말인가.
비밀 셋. 낙산공원
낙타 등에서 내려다본 서울
동숭동 뒷산은 낙타의 등 모양을 닮았다 해서 낙산이라고도, 혹은 왕에게 진상하던 우유(타락)가 생산되는 목장이 있었다고 하여 타락산이라고도 불린다. 이 낮은 구릉이 이래뵈도 풍수지리상 서울을 수도로 결정하게 한 사대 산인 내사산(인왕산, 남산, 북악산, 낙산) 중 하나다. 그것도 수도의 왼손격인 좌청룡으로 우백호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다.
번잡한 동숭동 도심 뒤편으로 넘어가면 동숭파출소를 기준으로 서울의 70∼80년대를 연상케 하는 낡고 조용한 주택가가 나온다. 이 주택가에서 오래된 가게와 집들을 구경삼아 두리번거리며 올라서면 낙산공원이 시작된다. 낙산공원 초입에 있는 낙산전시관에는 가타부타 낙산의 역사니, 낙산성벽의 돌쌓기 방식이니, 낙산에 대해 알아두면 설 풀기 좋을 정보들이 있다. 낙산공원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전망이다. 흐린 날에도 남산타워는 물론이고 사대문 안이 한눈에 펼쳐진다. 낙산공원은 196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마구잡이식 도시계획과 주택개발로 한때 낙산아파트를 중심으로 슬램가를 형성했던 곳이나, 2002년 낙산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산성이 혜화문부터 동대문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동대문 방면으로 가다보면, 도시의 근대화가 만든 풍경과 작금의 도시 공원화로 파생한 풍경이 어우러지면서 묘한 산책로를 이룬다. 성벽 오른쪽으로는 오래된 일본식 다다미 건물과 한옥이 낮은 처마를 잇대고 있다면 성벽 왼쪽으로는 현대식 다세대 주택과 빌라들이 전혀 다른 풍광이다. 이제 좀 걸었나 싶으면 길 왼쪽에 ‘since 1965 2대째 이어온 집 충신동 성터 냉면’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고추장에 무쳐 낸 시장냉면으로 출출한 뱃속을 감칠나게 쉬었다 가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