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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많던 MBC ‘영웅시대’ 종영

무늬만 리얼리즘 속은 무용담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문화방송 <영웅시대>가 1일 드디어 막을 내렸다. 애초 100회 예정으로 출발했으나 70회만에 일찍 물러났다. <영웅시대>는 애초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죽음을 연상케 하는 천사국 세기그룹 회장의 투신자살로 문을 열었다. 이후 그의 선대인 천태산과 라이벌 국대호의 창업 및 성장 과정을 다룬 뒤 다시 천사국 회장의 시점으로 돌아와 끝낸다는 게 처음 구상이었다. 그러나 드라마는 결국 1970년대를 넘지 못한채, 댐 건설과 조선소 건립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자는 구상에 박정희 대통령과 천태산 회장이 의기투합하는 장면으로 끝났다.

현실은 낭만적 무용담에 가려져

드라마는 끝났지만, <영웅시대>를 둘러싼 세간의 의문과 호기심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조기종영 과정에서 작가 이환경씨가 제기한 ‘외압설’을 둘러싼 것이다. 이씨는 끝내 ‘외압설’의 실체는 폭로하지 않았다. 그는 종영 전 언론 인터뷰에서 “<영웅시대> 1부 시작 전 엠비시가 아닌 외부인사로부터 ‘앞으로 무엇무엇을 조심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성 전화를 받았다”고 했지만, 지난달 25일 열린 드라마 종방연에선 “(종방) 이유는 유구무언”이라고 말했다.

외압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문화방송 안의 ‘내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화방송 노조와 보도제작국 및 시사교양국, 심지어 드라마제작국 일부 피디를 포함한 상당수 구성원들 사이에선 <영웅시대>가 재벌의 성장사 및 박정희, 이명박 같은 전·현직 정치인들에 대한 일방적 미화에 치우치고 있다는 우려들이 적잖이 제기됐다. 보도제작국의 한 기자는 “이미 에스비에스 <야인시대>에서 지나치게 편향된 반공보수 중심의 시각을 드러낸 바 있는 이환경씨의 기용과 <영웅시대>의 제작이 자칫 문화방송의 공영적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결국 사실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영웅시대>가 당대의 리얼리티를 충실하게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 또한 제기된다. 현실에서 소재를 빌려온 리얼리즘 드라마의 겉모양을 띠고 있지만, 정경유착과 개발독재 같은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기는 커녕 ‘영웅’들의 낭만적 무용담을 장식하는 소품쯤으로 취급했다는 지적이다. 이런 모습은 1980~90년대 초반 문화방송이 일찍이 선보였던 정통 리얼리즘 드라마와 날카롭게 대비된다.

당시 고석만 피디와 김기팔 작가가 짝을 이뤄 만든 <제1·2·3 공화국> 시리즈와 <거부실록> <땅> 같은 선굵은 정치·경제 드라마들은 사회적 파장과 함께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곤 했다. 땅 투기의 역사를 통해 한국사회의 정경유착 현실을 짚어본다는 기획으로 출발한 91년작 <땅>의 경우, 애초 50회로 잡았다가 불과 15회만에 조기종영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당시 문화방송 노보는 91년 1월6일 <땅>의 첫회가 방송된 다음날 최창봉 사장과 민용기 제작이사가 청와대 손주환 정무수석에게 불려가 질타를 당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권의 ‘외압’이 폭력적 형태로 실재하는 가운데서도 이런 드라마들은 정경유착과 빈부격차 같은 사회적 현실을 드라마 안에 끌어들여 리얼리티를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석만 복귀로 리얼리즘 부활할까

마침 <영웅시대>의 종영과 더불어 고석만 피디는 제작본부장으로 10년여만에 다시 문화방송에 복귀했다. 리얼리즘 드라마의 미래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영웅시대>의 종영이 무늬만 남은 리얼리즘 드라마의 재기로 이어질지 주목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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