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없는 남한에서 ‘백수의 왕’ 노릇을 해온 것은 삵(일명 살쾡이)이었다. 고양이처럼 생긴 삵은 성질이 사납고 거칠며 표범처럼 나무도 잘 탄다. 뚜렷한 반점이 있는 데다, 몸길이가 수컷의 경우 60~85㎝, 꼬리가 25∼32.5cm에 이르러 ‘호랑이 발견 소동’의 주인공 구실도 해왔다. 한반도에 서식하던 4종의 고양이과 동물 가운데 호랑이, 표범, 스라소니는 남한에서 씨가 말라 삵만이 고양이과 동물의 명맥을 지켜왔다.
1950년대까지 산간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삵은 그 뒤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 전국적인 쥐잡기 운동 이후 주 먹이인 쥐 등 설치류의 감소와 쥐약이나 살충제에 의한 2차 중독 탓에 삵은 멸종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나마 삵 100여마리가 현재 서산간척지에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92년 3천만평 땅에 기계 농법에 의한 농사가 시작되고 곡식 낱알이 많이 떨어지면서 삵의 먹이인 새와 쥐 따위의 서식에 유리하게 되고, 사람의 활동도 적어 동물의 활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9년 뒤로 전체 농지의 3분의 2가 피해어민과 개인에게 분양되면서, 농약이 많이 쓰이고 떨어지는 곡식 낱알은 줄어들어 삵의 생존 위협이 가속화되고 있다. 서산간척지 부근의 도로 확장으로 인한 교통사고도 삵을 이땅에서 몰아내고 있다.
이러다간 충남 서산의 삵도 자취를 감출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에스비에스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2003년 초 삵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 제작에 나섰다. 충남 서산에서 야영을 해가며 삵을 기다렸지만, 야행성 동물로 홀몸 생활을 즐기는 삵을 카메라에 담기는 쉽지 않았다. 1년이 지난 다음해 봄 제작팀은 덫으로 삵의 새끼 한 마리를 포획해 무선 발신 장치를 달아 정밀한 관찰에 들어갔지만, 그것도 무선장치가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몇차례 실패 끝에 제작진은 그해 초여름, 서산간척지 근처 도비산 바위굴에서 어미 삵과 세마리 새끼를 발견했다. 제작팀은 굴 주위에 넓은 막을 두르고 한달여 카메라와 조명에 대한 적응 기간을 거쳐, 국내 최초로 삵의 성장 과정과 생태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형제 간에 투쟁하는 새끼 삵과 섭식 중엔 새끼에게도 냉정한 어미 삵의 모습이 펼쳐진다. 신비로운 필치로 그려진 살아있는 삵의 모습은 2일 밤 11시5분 에스비에스 <고독한 사냥꾼, 삵>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