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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의 애버뉴C] 11st street / 친절한 로저 에버트씨
글·사진 백은하( <매거진t> 편집장) 2005-02-19

가끔 우리의 삶엔 감독이 아니라 코치가 필요하다

만약 한 사람의 관객의 입장에서 훌륭한 평론가를 뽑는다면 평단에서 인정하는 평론가와 다른 사람이 될 확률이 크다. 이번 주말 7천원의 돈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려야 하는 이기적인 관객의 마음으로 본다면, 자신의 영화사적 지식을 주석하나 붙이지 않고 끊임없이 늘어놓은 다음, “이 말을 이해 못하는 네가 무식한 거야!”고 쏘아붙이는 고매하신 평론가들 보다 나의 눈높이나 영화적 식견에 딱 반발자국만 앞서서 조용히 “이 길이야” 라고 손을 내밀어 주는 ‘친절한’ 평론가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 평론가의 선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취향의 무력한 추종이 아니라 기분 좋게 내미는 안전한 베팅이다.

나에게 그런 평론가를 꼽으라면, 국내에서는 허문영 영화평론가이고 국외에서는 단연 로저 에버트였다. 영화가 대중예술임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그들의 글은 한 사람의 독자였던 시절에도 언제나 내 동의를 이끌어냈고, 글을 직업으로 삼고 난 이후에도 미사여구의 범벅이 아닌 분명한 주장을 담은 명료한 그들의 글쓰기는 한 사람의 후배로서 늘 추종의 대상이었다.

그러니까, 멍하니 이번 주 <애비뉴C> 쓰던 중 ‘그 만남’이 오늘이었음을 뒤늦게 자각하는 순간 쓰던 원고를 팽개치고 달려나간 것은 거의 반사신경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늘 17일. 서점 체인인 ‘반즈 앤 노블’, 링컨 센터 지점에서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2>의 출판을 기념해 작가와의 대화시간이 있었다. (사실, 하루가 멀다 하고 개최되는 이런 무료 이벤트들의 찬란한 작자명단을 보고 있자면, 뉴욕이란 도시가 얼마만큼 문화의 중심에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2002년에 발간된 <위대한 영화>에 이어서 두 번째로 내놓은 이 책과 로저 에버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이벤트 시작 전부터 서점을 메우고, 행사장 밖에서 긴 줄을 서있던 사람들만으로도 짐작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화평론가로는 처음으로 퓰리쳐상까지 받은 이 백발의 평론가는 <시카고 선 타임즈>의 영화평, 그리고 <시카고 트리뷴>의 진 시스켈(이제는 고인이 된)과 함께 진행한 TV쇼 <시스켈과 에버트>를 통해 대중적인 인지를 넓혔던 평론가다. 이 프로그램은 영화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잃지 않는 가운데 마지막에 두 평론가의 엄지손가락이 아래로 향할까, 위로 향할까 하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다분히 오락적인 요소를 통해 가장 성공적인 영화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모두 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모든 영화광고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문구 “Two Thumbs up!”이다. 그들의 손가락 방향에 따라 어떤 영화의 운명이 매정하게 결정되기도 했으니, ‘친절한 에버트’씨도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한 남자였던 셈이다.

이전보다 조금은 마른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일단 책에 선정한 영화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마친 후 청중들의 질문을 받았는데,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피상적인 영화이론보다는 늘 실질적인 에피소드와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에는 자신의 글에 대한 독자들의 피드백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비포 선 라이즈>에 대해 쓴 글을 읽은 독자가 실제 기차에서 줄리 델피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를 만나 하룻밤의 사랑을 나누고 헤어졌는데 10년 후 <비포 선셋>이 나왔을 무렵 수소문 끝에 재회했지만 안타깝게도 여자가 결혼한 상태였더라, 같은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해주길 즐겼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화평론가가 되나요?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해야 할까요?” 하는 막연하면서도 절박한 한 젊은이의 질문에 “내 경우를 보자면 신문사에 취직을 했는데 내 앞 선배가 회사를 관두는 바람에 그 일을 맡기 시작하면서 영화평론을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해선 그 시절 <시카고 선 타임즈>로 돌아가서 나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면 될 거예요.(웃음)”라며 재치 있게 응수하더니 어떤 직업으로 가는 길은 결코 정도가 없음을 알려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 친구 중 하나는 평생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았지만 5-6년 전부터 영화에 심취해 자신의 웹사이트를 만들어 꾸준히 영화평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그 누구보다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기다리는 평론가가 되었죠. 물론 낮에는 평생 해왔던 직업을 유지한 채로 말이죠.”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할머니도, 장래의 평론가를 꿈꾸는 진지한 학생도, 무슨 구경 났나 들여다보고 있는 서점고객도 모두 이해하고 동감할만한, 쉽고 명쾌하고 위트있는 대화였다.

최근 개봉해서 박스오피스를 두드린 영화 <히치>는 ‘데이트의 ABC’를 케이스 별로 상담해주는 데이트 전문 코치, 윌 스미스의 이야기다. (꽤 흥미로운 소재의 이 영화는 불행히도 그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진 못한다.) 그 영화를 보면서 ‘코치’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가끔 우리의 삶엔 감독이 아니라 코치가 필요하다. 취향은 결국 자신이 개발하고 가꾸어나가야 할 고유한 영역이지만 맥 놓고 잠시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이건 어때?” 라고 말해 줄, 그러나 정확한 이유를 들어 좋은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코치. 그들에게는 감독과는 다른 미덕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친절함이다. 평론가는 감독이 될 수 없다. 가끔 글을 쓰다 보면 그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종종 그것을 망각한 글들을 주변에서 보기도 한다. 적어도 그 글이 혼자 갈겨대는 일기가 아니라 독자를 향해 있는 글이라면, 평론가가 쓴 글이 친절함이란 미덕을 버렸을 때 그것은 배설이 되는 법이다. 로저 에버트와의 만남은 오랜만에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물론 그는 결코 호통을 치거나 야단치지 않았다. 그저 두 엄지를 조용히 들어올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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