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
인도 출신의 여성이론가 스피박은 이 질문 하나로 탈식민주의 이론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백인들의 사회에서 활동하는 인도 출신의 여성이라는 하위주체로서 질문했던 것일 게다. 그 대답은 짐작하다시피 “하위주체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누군가 그들을 대변하고 대신해서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그들의’ 생각이고 그들의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대답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이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위주체 혹은 소수자가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다리에 힘이 빠지고 서 있을 수도 없게 되었건만, 추방과도 같은 귀국을 해야 했던 타이의 여성노동자들, 혹은 몇년 전 역시 노말헥산에 중독되어 앉은뱅이가 되어 쫓겨나듯 돌아가야 했던 중국의 여성노동자들, 그들은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고통을 그저 감수해야 했다. 물론 말했을 것이다. 아프다고,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 말들은 ‘엄살’이니 ‘꾀병’이니 하는 비난 섞인 몇몇 단어들만으로 곧장 지워졌으며, 그것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땐 감금과 격리라는 아주 ‘고전적인’ 방법으로 침묵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말하지만 그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할 수 있는 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으며,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잘리고, 손목이 잘려나가도 그들은 말하지 못한다. 욕을 먹고 얻어맞아도, 얻어맞다 죽는 경우에도 그들은 말하지 못한다.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찬드라’라는 가슴 아픈 이름을 잊지 못한다. 네팔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가, 어색한 행동과 어눌한 말 때문에 행려병자가 되었다가 급기야 정신병자가 되어야 했던 사람. 청량리 정신병원, 용인 정신병원에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갇혀 지내야 했던 사람. 그 역시 말했을 것이다. 목소리 높여 항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병원의 벽, 아니 자기보다 검은 피부의 외국인을 무슨 짐승 보듯 하는 ‘한국인’이란 벽에 갇혀 들리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 끔찍한 침묵 속에서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을 소진해야 했다. 고통 속에서. 그는 불법체류자도 아니었는데….
이런 점에서 그들 모두는 도롱뇽과 닮았다. 실험실에서 죽어가는 실험동물과 닮았다. 이들 역시 고통스레 외쳤을 것이다. 숲을 망가뜨리면 우린 모두 죽고 만다고. 수많은 동료들이 이미 그렇게 죽어갔다고. 혹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주삿바늘을 보며 고통스레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제발 그만!!” 하지만 그 소리는 모두 거대한 침묵 속에 갇혀 있어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 그 고귀하신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펭귄이나 소나무가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거나, 그들에게 투표권이나 발언권을 줄 순 없지 않느냐며 그 대신 못사는 인간들을 위해 돈을 쓰는 게 낫다는 ‘회의적 환경주의자’의 말에 분노한다. 또한 나는 권리를 다투는 시민운동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 타이의 노동자도, 찬드라도, 천성산의 도롱뇽도 그 잘난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다툼을 할 아무런 권리를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처참한 장면 옆에서 ‘한국인’이고 ‘인간’인 내가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것은, 비록 그들 대신 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침묵을 드러내고 침묵 속의 고통을 소리나게 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3년 전 ‘정체불명의 병’을 앓던 중국 노동자들을, 300장이 넘는 조사기록을 만들며 5개월간 추적해 노말헥산 중독임을 밝혀냈던 박태순(대열보일러 노조위원장)씨, 찬드라를 찾으러 온갖 수용소와 병원을 헤매던 이주노동자센터 활동가들, 석달을 넘는 목숨을 건 단식으로, 도롱뇽을 비롯한 생물들의 생존문제가 목숨을 건 문제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 지율 스님 같은 사람들.
물론 이들이 말하는 것이 소수자 자신의 말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들이 소수자가 말할 수 없다는 것, 침묵 속에 갇혀 지내고 있다는 것, 그런 삶이 아주 고통스럽다는 것, 그런 고통을 만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잔혹하고 처참하다는 것, 그래서 침묵 속에 갇힌 그들의 말소리, 그 침묵 같은 조그만 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는 것을 또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소수자들, 하위주체로 하여금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내가 하위주체는 말할 수 없다는 스피박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