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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그리움
안규철(미술가) 2005-02-18

경제가 어렵다는 얘기를 몇년째 듣는지 모르겠다. 가끔 좋은 시절이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항상 그 시절이 지난 다음에야 그것을 알게 된다. 경제가 잘 돌아가는 동안에는 아무도 내게 그런 얘기를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경제가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여유가 있는 사람들마저 돈을 쓰지 않아서 문제라는 것이다. 경기가 회복되려면 있는 사람들부터 돈을 써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처방이 정말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은 자신에게 부재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려면 우선 소유의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제공하는 가치가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며, 그 결여를 채우려는 절실한 욕망이 있어야 한다.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가 있고, 그것을 구입하면 생활이 편해지고 사랑받고 젊어지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치들을 그리워해야 한다. 비록 일시적 허상에 불과할지라도, 그것들에 의해 변화될 새로운 삶의 모습을 그려보고 그런 상태를 그리워하게 되어야 돈을 쓰는 것이다.

사람이 돈을 쓰지 않는 것은 소유의 대상이 없거나, 그것이 제공하는 가치가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음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그 결여를 채우려는 절실한 욕망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갖지 않아도 견딜 만하고, 그것이 약속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그려보아도 그런 상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돈을 쓰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물질의 소유 자체에 대한 회의 때문에 돈을 쓰지 않는다. 이들은 상품의 구매가 존재의 무상함을 잠시 잊게 해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소멸시킬 수는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돈을 쓰게 해서 경제를 살리려 한다면, 그들에게 무언가 결여된 것이 있으며, 그것의 부재로 인해 그들의 삶이 얼마나 불행하고 황폐한지를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부재하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두려움과 냉소를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커져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쓸 만큼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럽게 그리움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 대부분은 소비를 통한 자기과시의 어리석음과 순간적 충동의 허망함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그 주머니 속에 돈이 남아 있기 어렵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엇이 부재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지를 알려줄 수 없다면,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돈을 쓰라는 말은 공허할 뿐이다.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것은, 한편에서 새로운 상품의 형태로 그리움의 대상이 생산되고 다른 한편에서 전염병처럼 확산되는 그 유혹에 넘어가 그것들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날이 갱신되는 그리움이 아니면 돌아가지 않는 경제와 함께 살고 있다.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이로 인해 우리 스스로가 무언가를 그리워할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그리움은 상품기획자에 의해 미리 지정되고 조직되어 완성품의 상태로 제공된다. 우리는 똑같은 바이러스에 집단 감염되며,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 돈을 벌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노동을 팔아넘겨야 할 뿐이다. 스스로 그리워할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그리워해야 할 부재의 핵심일지 모른다. 홈시어터를 들여놓고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아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한 누구나 그것을 위해 인생을 낭비할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