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씨네21> 설 특별 프로그램 [2] - 책

책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

‘여행’.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단어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의무감, 꽉 막힌 고속도로, 붐비는 인파, 바가지 요금 등 무거운 짐이 한둘이 아니다. 여기 이런 근심없이 최고의 편안한 자세로 오직 나만의 상상력까지 더해 떠나는 여행이 있다. 책과 함께 모든 짐을 버리고 가볍게 떠나보자. 서울 6백년 답사부터 유럽, 미국, 알프스 산맥까지.

1. 서울 도심 탐험

각종 연휴가 다가올 때마다 두려워진다. 집에만 있자니 지난해 그리고 지지난해 연휴 때도 봤던 TV 특집영화를 또 보게 될 것 같다. 불행히도 이 예감은 거의 매년 적중한다. 여행 떠나자니 막히는 길도 붐비는 인파도 싫다. 이럴 때 택해봄직한 타협책이 도시 탐험이다. <답사여행의 길잡이15: 서울>(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돌베개 펴냄)이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다. 한강 유역과 백제, 서울 도성과 궁궐, 북한산, 근대 건축, 이렇게 4개 주제로 나누었다. 답사지마다 대중교통 노선은 물론 입장료나 관련 전화번호도 정리해놓았다.

이 가운데 서울의 근대 건축 부분이 눈길을 끈다. 정동교회, 구 러시아공사관, 성공회성당, 약현성당, 명동성당, 한국은행 본관(현 화폐금융박물관), 서울역사, 천도교 중앙대교당, 대한의원, 용산신학교와 원효로 성당. 서울에 살거나 서울을 자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라도 한번쯤 보았을 건물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든 곳은 사적 제255호로 지정돼 있는 용산신학교와 원효로 성당이다. 프랑스 신부의 설계로 각각 1892년, 1902년 완공된 붉은 벽돌의 고딕·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여기에서 괜한 걱정 하나. 노무현 정부의 주요 국가 시책인 지방분권화에 역행하는 책 추천이 아닐지. 이럴 땐 정보기술(IT)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다음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서울의 주요 문화 유적 및 유물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http://sca.visitseoul.net/). 여기에 ‘서울 6백년사’ 웹사이트를 참고하면 더욱 좋다(http://seoul600.visitseoul.net/). 사견이지만, 서울시 최대의 (혹은 유일한?) 문화적 업적이 바로 위의 두 웹사이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에 장태동의 <서울문학기행>(미래M&B 펴냄)까지 갖추면 금상첨화이며, 근대 건축쪽으로 주제를 심화시키고 싶다면 김정동의 <근대 건축 기행>(푸른역사 펴냄)이 안전한 길잡이다.

2. 몽상의 도시 프라하, 바르샤바, 파리

‘님은 품어야 맛이고 잔을 비워야 맛’이듯, 여행은 떠나야 맛일까? 떠나야 제 맛이겠지만 떠나지 않아도 맛을 느낄 수는 있다. 이지상의 <황금소로에서 길을 잃다>(북하우스 펴냄)를 통해 동유럽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시베리아 여행기, 터키 여행기, 인도 여행기 제목을 각각 ‘겨울의 심장’, ‘길 위의 천국’, ‘슬픈 인도’라 했던 저자는 프라하에서 드디어 길을 잃었나보다. ‘길을 나서면 세상은 늘 흘러가는 강물이었다’는 이 책의 첫 문장에서 우리나라 프로페셔널 여행가 1세대로서의 범상치 않은 경지가 느껴진다.

이 책의 특징은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직후 홀로 떠난 1992년 겨울의 여행과, 2002년 여름에 아내와 함께했던 여행, 이렇게 두 여행의 기록을 담았다는 점이다. 빈곤과 불안과 좌절이 드리워져 있던 10여년 전 모습과 그때에 비해 한결 밝아진,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는 최근 동구권 모습이 갈마든다. 10년의 세월을 격해 같은 곳을 여행한다는 것. 새삼 나를 돌이켜보게 된다. 지금까지 여행했던 곳들 중에 그렇게 여행할 만한 곳으로 어디가 좋을까? 그런 곳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제목의 황금소로는 황금 세공사들이 모여 살았다는, 16세기 풍경을 간직한 체코 프라하성 근처 좁은 길이다. 그 길에서 주황색 담벼락에 22라고 쓰인 곳이 카프카가 1916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머물렀던 작업실이다. 내친 김에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카프카>를 봐도 좋겠지만 ‘카프카를 키운 건 8할이 프라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클라우스 바겐바흐의 <카프카의 프라하>(열린 책들 펴냄)를 통해 작품을 구상하며 밤길 거닐기 좋아했던 카프카의 산책로, 그가 살던 집, 채식주의자 카프카의 단골 레스토랑, 카프카가 잠들어 있는 유대인 공동묘지까지 따라가며 ‘갖가지 몽상들을 잡아놓는 거미줄’ 프라하를 탐험해도 좋으리라. 프라하와 달리 ‘벽돌 한장까지 고증을 거쳐 재건’되어야 했던 비운의 도시 바르샤바를 주제로 한 최건영의 <바르샤바>(살림출판사 펴냄)도 덩달아 강추!

유럽쪽으로 길을 나선 김에 김윤식 서울대 명예 교수의 안내로 파리를 들러보자. 다분히 문학적인 혹은 학술적인 여행이 될 듯한 예감, 그 예감이 맞아떨어진다. 제목부터 <내가 읽고 만난 파리>(현대문학 펴냄)이니, 이 학자는 어딜 가든 그곳과 ‘읽고 만나는 데’ 익숙하다. 내가 처음 읽은 김윤식의 여행기는 ‘김윤식 학술 기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아득한 회색, 선연한 초록>(문학동네 펴냄)이었다. (굳이 우리말 어법을 무시하고 표현한다면) ‘김윤식스러운 여행’이 처음에는 불편하기까지 했지만, 이후 이 책을 포함한 몇권의 ‘김윤식스러운’ 여행기를 읽으면서 ‘인식’과 ‘느낌’, 앎의 욕구와 삶의 충동이 보기 드물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균형이라는 게 그 얼마나 어려운가.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리닝(李寧)이 말하길, ‘평행봉에 정지해 있는 순간, 나는 하늘과 땅과 내 몸(天地人)의 평형을 만끽한다’.

2003년 4월 파리에서 샤갈 전시회를 둘러본 저자는 같은 해 7월 서울에서 열린 샤갈전을 관람했다. 먼 이국과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샤갈과 만난 저자는 이제 과거의 시간으로 떠나 자신의 삶을 돌이켜본다. “샤갈의 그림은 유년기가 한 인간의 생애를 어떻게 이미지로 지배하는가를 사유하게 했다. 내게는 샤갈처럼 사제이자 백정이었던 외조부도, 유대교도, 그림 학교도 없었고, 열린 낯선 세계라고는 읍내 소학교에 다니는 누나의 교과서뿐이었다. 샤갈은 교과서 속으로 들어가 머리가 희도록 살아온 내게, ‘너는 잘못 살았다’고 가르쳐줬다.” 샤갈의 작품 세계가 보여주는 열정과 혼과 상상력은, 오로지 인식에 바쳐진 삶을 산 노학자에게 일종의 회한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내가 즐긴 노트르담은 따로 있었다. 너무도 고요한 아침의 노트르담, 햇빛 속의 그 장중한 건물이었다. 건물과 햇빛을 빼면 아침의 고요함만이 내가 즐긴 것이었다. 여인의 발자국 소리, 그 여운을 옆에 둔 노트르담.” 정말 그렇다. 같은 장소를 여행한 수많은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 모두는 각기 다른 곳을 여행한 것이다. 한 사람이 같은 장소를 여러 차례 여행했을 경우에도 그 사람은 매번 다른 곳을 여행한 것이다. 주관주의, 상대주의, 구성주의는 모두 여행에 적용할 때 가장 적합한 말이다.

3. 예술과 열정의 도시 뉴욕

서울 찍고, 프라하 찍고, 파리를 찍었으니 다음은 어디로 가볼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수전 손택, 올해 방한할지도 모른다는 작가 폴 오스터, 퓰리처상을 수상한 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 그리고 우디 앨런. 이들의 공통점은 뉴욕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다. 특히 ‘뉴욕 삼부작’으로 유명한 폴 오스터,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뉴욕 대학을 중퇴하고 뉴욕을 근거지 삼아 뉴욕을 무대로 한 영화를 많이 만든 우디 앨런이 아니던가. ‘뉴욕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일생일대의 사랑에 빠져’ 9년째 뉴욕에 살고 있는 화가이자 번역가 박상미의 <뉴요커>(마음산책 펴냄)를 통해 잠시나마 뉴요커가 될 수 있다.

박상미가 각별히 아끼는 뉴욕은 <섹스 앤 시티>에 나오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분위기의 뉴욕이 아니다. 그보다는 비록 지금은 가진 게 별로 없고 성공하지도 못했지만 원대한 꿈을 가질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뉴욕, 지금은 가난해도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뉴욕이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남들은 모르고 자기만 안다고 생각하는 작은 사실들이 제공해주는 어떤 실존적 구석’을 소중히 여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구석, 그랜드센트럴 역의 ‘오이스터바’, 평화롭고 안온한 ‘스푼빌&슈가타운’ 서점 등이 저자가 발견한 구석들이다.

“뉴욕 거리를 돌아다닐 때는 혼자가 좋다. 혼자 헤매고 다니다보면 쇼윈도에 내 코트 자락이 무슨 검은 매의 날개나 되는 것처럼 휙 날리는 것이 비칠 때가 있다. 내 존재에 대한 도시의 화답. 그럴 때면 빌딩 사이에서 또 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리는 것 같다. ‘뉴욕이라는 정글의 공기를 마시는 한, 너의 야생의 정신을 안락한 삶 속에 가두지 말지어다’.” 9년째 머무르고 있으니 저자에게 뉴욕은 더이상 여행지가 아니라 체류지 혹은 어쩌면 정착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무슨 상관이겠는가? 한곳에서 며칠 머무르지 않는 잠깐의 여행을 바탕 삼아 쓴 여행기들의 부박(浮薄)이 싫은 독자라면, 9년 체류의 역사에 바탕을 둔 뉴욕 체험기가 반가울 것이다. 현장 체험기에서 더 나아가 뉴욕의 과거까지 속속들이 알고 싶은 독자라면 프랑수아 베유의 두툼한 책 <뉴욕의 역사>(궁리 펴냄)가 타임머신이 되어줄 것이다.

4. 탐험의 세계-애팔래치아, 아이거 북벽

서울, 프라하, 파리, 뉴욕이면 아시아, 유럽, 북미를 거친 셈이다. 아프리카를 빼놓기 아쉽지만, 이미 소개한 책의 저자 이지상의 <나는 늘 아프리카가 그립다>(디자인하우스 펴냄)를 제목만 언급해두고 넘어가기로 한다. 마음속에 늘 그리운 어떤 곳을 지니고 사는 것. 그 그리움이 실향민들처럼 비원(悲願)이라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행했던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아름다운 일이다. 미국 동부 14개 주를 관통하는 대산맥 종주에 나섰다가 결국 실패한 두 중년 남성 브라이슨과 카츠는 그 대산맥 애팔래치아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책제목이 <나를 부르는 숲>(동아일보사 펴냄)이니 말이다.

성공한 저널리스트 빌 브라이슨, 숙식 걱정이나 덜 요량으로 친구를 따라나선 변변치 못한 친구 카츠. 동행자 구색부터 심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을 습격하는 무시무시한 야생 곰에 관한 문헌에서 빌 브라이슨은 야생 곰이 스니커즈를 가장 좋아한다는 정보도 접했다. 그런데 아뿔싸! 친구 카츠가 들고 온 배낭에는 스니커즈가 가득했다. 카츠는 종주에 나선 다음에도 자주 길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무겁다는 이유로 필수품까지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는 등, ‘덤 앤 더머’를 연상시키기 일쑤다.

결국 애팔래치아 종주 전체 코스의 절반에 못 미치는 1400km를 이동한 지점에서, 카츠가 갈증과 탈진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이들은 속세로 돌아오고 말았다. 종주에는 실패한 그들이지만 ‘삼림과 자연, 숲의 온화한 힘에 깊은 존경을 느꼈고, 세계의 웅장한 규모를 이해하게 됐으며, 무엇보다도 인내심과 용기도 발견했고 친구도 얻었으니’ 여행에는 성공한 셈이다. 애팔래치아와 마찬가지로 산맥은 산맥이지만 크게 다른 산맥, 알프스 산맥의 ‘사람 잡아먹는 귀신’ 아이거 북벽 등반기, 정광식의 <아이거 북벽>(경당 펴냄)을 각별하게 권하고 싶다. 클라이머들의 뜨거운 동지애와 내면 풍경이 감동으로 다가오기 충분하다.

5. 여행에 관한 단상

이제 내가 허락받은 원고 분량이 거의 끝에 달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절실해지는 법이다. 마지막 한권은 어떤 책으로 해야 할까, 하는 절실 혹은 절박함. 아무래도 여행의 철학 비슷한 책으로 사뭇 거창하게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속된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여행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라고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을 법한 통찰을 내세운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레 펴냄)로 마무리짓고 싶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10분을 넘기기 힘들다.” 정말 그렇지 않던가?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끄덕.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어설프게나마 학교에서 철학을 전공 삼아 공부했던 필자가 보기에, 위의 인용문은 알랭 드 보통이 철학자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바탕 삼아 여행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는 걸 은근슬쩍 내비친다는 걸 보여준다. 혹시 이 때문에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궁금해졌다면, 이석윤이 번역한 <판단력 비판>(박영사 펴냄)을 붙들고 차근차근 읽을 일이며, 그게 너무 무겁다면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청미래 펴냄)를 펼쳐볼 일이다. 책이란 본래 이 세상 책들의 수효만큼이나 많은 갈래의 길들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