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일본이 잿더미에서 시작해 후일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한국전쟁으로 인한 군수산업의 활황이 결정적 계기였음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20년(1950∼70) 동안 미국은 매년 평균 5억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일본에 퍼부었다. 아시아에 있어 미국의 적자로서 패전 일본은 그렇게 키워졌던 것이다.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해마다 5억달러의 원조를 챙기던 그 어느 해였던 1965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라는 거금(?)을 받아들게 되는 협정에 조인하게 된다. 식민지 지배 36년의 치욕과 고통에 대한 금전적 대가였다. 13년4개월의 길다면 긴 협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쿠데타로 이제 갓 권력을 잡은 박정희였다. 이 첫 번째 빅딜은 시골 장날의 장돌뱅이도 차마 엄두를 내기 힘든 기막힌 장사였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들어가 가장 큰 곤욕을 치러야 했던 필리핀과 베트남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뒤 각각 5억달러와 4억달러의 배상금을 받아들었다. 필리핀과 베트남이 감내해야 했던 4년의 고통과 피해는 36년 식민지 지배를 겪어야 했던 조선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었다. 하물며 신생 이스라엘은 서독으로부터 30억달러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주판알은커녕 돌조차 퉁길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풋내기 정치군인들이 일본의 노회한 모리배들의 손에 놀아나 조국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 것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박정희의 한일협상이었던 것이다. 배상금으로 35억달러를 요구했던 이승만은 그만두고, 시골 장돌뱅이 눈으로 보아도 형편없이 밑지는 장사를 통 크고 무식하게 마무리한 박정희는 지금 남한의 일각에서 그 푼돈을 종잣돈으로 후일 남한의 기적적 경제발전을 이룬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박정희가 일본으로부터 구걸한 그 3억달러가 진정으로 남한 경제발전의 종잣돈이었다면 박정희야말로 남한경제 제일의 범죄자이다. 3억달러가 아니라 30억달러의 종잣돈을 만들었다면 후일 남한경제는 10배는 아니어도 3∼4배는 더욱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이 전후 남한의 경제발전 신화에서 박정희가 신이 아니라 빠가야로가 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주식회사 남한을 설립하는 데에 있어서 자금조달에 형편없이 무능한 빠가야로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표이사 박정희는 사업에 열중하는 대신 룸살롱, 아니 요정을 전전하며 하청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겨 그 돈을 흥청망청 사업외적 용도에 탕진하는 비도덕적인 사업가였다. 그 흥청망청의 비용에 일본으로부터 구걸한 쥐꼬리만한 창업자금도 포함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하튼 사업이 신통했을 리 없다. 박정희는 친애하는 일본을 본받아 군수산업에 눈을 돌렸다. 그것도 실력이 없는 탓에 사람장사로 나섰다. 베트남 전쟁의 와중에 노동자의 진짜 피를 팔아 매출을 올리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어떤 장사라도 이렇게 막 나가기로 결심한다면 일단 매출은 오른다. 조국근대화의 본격적인 깃발은 이렇게 피장사가 막을 내리던 70년대에 깃봉을 올라탔다. 그야말로 종잣돈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70년대에 박정희는 군인의 길과 장사꾼의 길을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키는 방법을 터득했다. 철권으로 노동자들을 조져 매출을 올리고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애들은 조져야 한다는 엽전의식의 일상적 의식화와 함께 저질의 국가주의, 군사주의, 부정과 부패는 70년대 박정희식 마케팅의 근본이었다.
박정희라는 얼치기 장사꾼과 함께 70년대를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과 함께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 남한경제는 성장의 결정적인 시기를 시궁창에 처넣어버려야 했다. 빠가야로의 후예들이 틈만 나면 침을 튀기며 떠들어대는 그런 종류의 성장일지라도 남한은 일본과 비교해 썩 잘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종잣돈을 잘 끌어들이고 합리적인 경영을 추구했다면 아마도 일본이 10년 불황의 터널에 진입했을 시점에 남한경제는 일본을 추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정희가 목덜미를 쥐어틀었던 남한은 최악으로 기록되는 저질의 경제성장 노선을 정착시키고 이후 그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남은 것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감내해야 했던 극악한 고통 그리고 봉건적 유제와 군사문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뒤범벅된 박정희의 유산이었다.
한일협정의 빠가야로는 그렇게 몬스터가 되어버렸다. 80∼90년대의 지난한 민주화 과정을 거치고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그 몬스터가 숨어 있다. 이 몬스터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모두 빠가야로의 시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