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태를 다룬 <그때 그 사람들>은 여러모로 기록적이고 예외적인 영화다. 촬영을 마치기까지 제작사가 일체 영화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유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사의 정치적 뇌관을 본격적으로 건드린 매우 드문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중년배우들이 대거 주역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마 개봉 이후에 이런 목록은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1월 말 시사회, 그리고 2월 설 개봉을 앞두고 성급하게 영화의 궁금증을 벗기려는 까닭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다. 한국에서 정치성 짙은 리얼리즘영화가 과연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진지한 성찰적 접근이 어떤 정치적 파장으로 연결될까는 영화관객에게만 한정된 관심사가 아닐 것이다. 예민한 정치적 문제 때문에 영화의 맨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가편집본은 물론 시나리오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영화에 대한 어떤 예단도 할 수 없다. 다만 얻을 수 있는 것은 감독과 현장 스탭, 배우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전부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영화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보려 했다. 이 글은 영화의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의 일부이며 그것조차도 얼마든지 개봉 시점에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명예훼손을 막기 위해 최대한 실명 사용도 자제했다. 편집자
풍자성 강한 정치드라마가 될 듯
한 일간지의 도발적인 예측성 기사를 기폭점으로 해서 <그때 그 사람들>에 관한 풍문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과거청산이 뜨거운 논쟁거리로 달아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싼 풍문은 거센 속도로 번져나갔다. 제작사인 강제규&명필름은 이 작품을 ‘본격적인 정치드라마가 아니라 블랙코미디’로 홍보하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고 잇따라 예고편과 인터뷰 등을 내보냈다. 얼마 뒤 박 전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씨가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내면서 언론의 관심도 더욱 커졌다. 영화에 관한 논란은 영화도 개봉하지 않은 시점에서 계속 불거져나오고 있다.
영화상영을 하기도 전에 이토록 논란을 불러일으킨 영화가 얼마나 있었던가. 영화의 내레이터로 참여한 윤여정이 임상수 감독에게 전화로 했다는 농담 아닌 농담은 이 영화의 모험적 성격을 잘 말해준다. “너야 원래 미친놈이니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쳐도 이런 영화를 하겠다고 받아주는 영화사가 어디 있겠느냐. 받아준 영화사에 감사해야 한다.” 설령 예민한 정치적 소재를 흥행으로 연결시키려는 전략이 보인다고 해도, 이런 예외적이고 과감한 시도는 주목할 값어치가 충분해 보인다.
임상수 감독의 네 번째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은 코미디 여부를 떠나 강한 풍자적 성격을 띤 정치드라마가 될 가능성이 크다. 우선 임상수 감독이 설정한 등장인물을 보자. 사건의 주모자로 나오는 박 부장은 외골수 마초 사무라이이며, 그 반대편에는 제왕적 존재인 각하가 등장한다.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박 부장이나, 제왕적 존재인 각하나 모두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에 기대어 한 사회를 좌지우지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임 감독에 따르면 제왕의 일상은 보통 사람들에게 악몽이었지만, 그렇다고 쿠데타가 억누를 수 없는 민주주의의 신념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박 부장의 입장에서 보면 사나이의 길이며, 그와 사사로이 의리에 얽힌 ‘오른팔’ 주 과장에게는 ‘인생을 쇼부봐버리는 일’이며, 주 과장의 운전사 상욱에게는 ‘단지 총을 쏠 줄 안다는 이유’로 연루된 불운한 일이다.
“박 부장의 오른팔 주 과장과 왼팔 민 대령만 거사에 대해 알고 나머지 가담 인물은 그에 대해 몰랐다. 모두들 즉석에서 구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들도 역시 주모자들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그 짧은 순간에 생과 사가 갈렸다는 게 아이러니 아닌가.” 임상수 감독은 이 영화가 각하나 박 부장 등 주연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의 종료를 위해 황급하게 사형에 처해진 무명 인사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굵은 줄거리는 사실의 밑둥 위에서 뽑고, 잔가지는 상상력으로 뽑았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실제 사건의 재현보다 그 사건이 지닌 의미를 묻는 데 더 주력한다. 임 감독은 각하(송재호), 양 실장(권병길), 주 과장(한석규) 등을 비롯해 캐스팅에서도 목소리나 외모가 얼마나 닮았는가보다는 연기력을 중심으로 뽑았다고 말했다.
과연 이 영화는 어떻게 10·26을 재현했을까. 갑자기 영화 관련 인터뷰들이 쏟아지고, 엇비슷한 TV 연예프로그램 카메라가 백윤식의 얼굴을 줄기차게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영화의 예민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알 수 없다. 우리는 감독과 현장 스탭, 그리고 배우들과의 집중 인터뷰로 영화를 덮고 있는 미디어의 안개를 헤쳐가고자 했다. 이들에게 구술을 받아 픽션을 뒤섞어 구성한 다음의 몇 장면은 이 영화의 실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입구까지는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구술을 바탕으로 한 재구성이기에 일부 대사와 지문은 실제 시나리오나 영화와 다를 수 있다.
권력과 캐릭터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미술
#1. 실내. 남산 부장 집무실 (침대에 누워 등에 부항을 뜨고 있는 박 부장. 민 대령이 조심스레 다가간다.) 민 대령/ 부장님. 오늘 저녁 궁정동에서 연회하신답니다, 큰 걸로…. 박 부장/ 또? (골똘히 생각에 잠긴 박 부장. 시커먼 썩은 피가 등에서 나온다.)권력의 2인자 자리를 놓고, ‘각하의 맹목적 심복’이자 ‘실질적 넘버 투’인 조 실장(정원중)과 겨루고 있는 박 부장의 집무실 장면이다. 짙은 고동색을 주조로 한 드넓은 실내, 직선 위주의 벽 디자인, 고풍스런 가구와 장식용 칼, 그리고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실내등 디자인, 그리고 서가 등이 검박한 무인의 기풍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운현궁 양관에서 촬영됐다. 임상수 감독은 처음엔 남산중앙정보부의 살벌한 지하실(파주 세트장 촬영)에 이어 호화로운 부장의 집무실을 한컷에 담아 보여주려 했다고 한다. 밑에서는 고문이 자행되고 위에서는 한가로이 부항을 뜨는 장면의 대비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이다(이 계획은 CG 여건상 장면 구성이 바뀌었다).
부항을 뜨는 이는 실제로 부항을 뜨는 전문가이며, 화면에 나오는 피도 박 부장 역의 백윤식 피라고 한다. 임 감독은 백윤식의 등에서는 실제 간이 좋지 않은 박 부장의 검붉은 피 대신에 선명하고 붉은 건강한 피가 나왔다고 말했다. 등을 보이고 있는 민 대령 역의 김응수는 극단 목화를 거친 연극배우 출신으로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학교를 나왔으며 이 작품에 나오는 일본어 대사를 지도, 감수했다. 임 감독 작품 네편에 모두 선보였다.
부장 집무실의 직선형 디자인은 주 과장 집무실 등 다른 남성적 공간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고 이민복 미술감독()은 말한다. 복도 한켠에 옹색하게 마련한 주 과장의 집무실처럼 직위에 따라 방의 크기는 다르지만 곡선을 배제한 직선형 벽 문양과 어두운 색조는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실내등 디자인도 경사진 일반 갓등이 아니라 보기 드물게 직선형이다. 이런 직선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강인함과 남성성이다.
조 실장의 집무실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그의 집무실은 박 부장의 것에 비해 더 넓고 화려하다. 그러나 서재도 없이 반질반질한 대리석으로만 빛나는 그의 집무실은 박 부장의 것에 비하여 더 휑뎅그렁하다. 이민복 미술감독은 조 실장 집무실이 철저하게 개성이 거세되어 있으며 박 대통령 집무실의 축소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책상과 방 디자인은 똑같고 다만 크기만 줄어들었을 뿐이다. 맹목적인 2인자의 이미지를 도출하기 위해서다. 1979년 사건 당시의 사진과 현장 기록, 텔레비전 화면 캡처 등을 바탕으로 만든 디자인은 역사적 고증보다는 이런 극적인 이미지를 뽑아내는 데 더 역점을 두었다고 한다. 당시 경제사정에 비추어보았을 때 매우 희귀했을 일본에서 직수입한 비데 같은 소품은 똑같이 재현하려고 했다.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비밀리에 부쳐져 있고, 권력의 성역이라 할 만한 장소들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까닭에 감독과 미술감독은 고증보다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재구성에 더 몰두했다. 그렇다고 영화 속에 웅장하고 호사스런 장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처럼 휴일을 아내와 함께 보내려다 거사에 연루된 장원태(김상호, 에서 휘발유 역)의 집은 단 하나의 예외적인 장소이다. 단칸방과 부엌 하나가 전부인 원태의 셋방은 연희동의 비밀 요정, 궁정동 안가, 각하를 비롯한 거물들의 집무실과 대비되어 쓴웃음을 자아낸다.
가장 문제적 장소 궁정동 만찬장, 어떻게 재현했나
#2. 실내. 별관 만찬장-밤 (심상효(충직하며 말없는 집사, 연극배우 조상건)가 세팅을 한 테이블 위에 송이버섯이며 바닷가재 따위를 정성스레 놓는다. 경호실 신 처장과 직원 재국이 들어와 화장실과 방 점검을 마치면 이윽고 들어오는 각하, 조 실장, 양 실장, 박 부장.) 각하/ 어이, 심군 또 왔네. 상효/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한다.)만찬장은 각하 시해사건이 벌어지는 문제의 장소다. 전체 103개 안팎의 장면들이 이 장면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비중이 높다. 이 장면을 시작으로 영화 중반부까지 만찬장 내부는 바깥장면들과 교차되며 긴장의 수위를 차곡차곡 쌓아올릴 것이다. 현대사의 치부를 건드리는 민감한 성감대가 여기에 있으며, 이 영화의 논쟁적 뇌관도 이 장면 안에 파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단식으로 된 독특한 연회장 내부 디자인부터 실내 총격 장면, 목숨을 걸고 주고받는 대사들의 높은 전압 등이 주목거리다.
“지극히 소수만 드나들 수 있는 비공개 장소이며, 국가의 1인자가 개인적으로 즐기는 곳이란 점에서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장소라는 점에서 흥미롭고 영화적으로는 얼마나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가 걸려 있는 지점”(임상수)이다.
실제 궁정동 자료 사진과 영화 사진을 대비해보면 궁정동의 실제 주연 장소는 소박해 보이지만(그러나 천장 디자인은 엄청나게 화려하다), 영화 속에선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어 있고 위용도 과장되어 있다. 바닥을 파서 다리를 내릴 수 있게 한 점도 마찬가지다. “계단 설정은 계급의 상승과 동시에 하강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에 그렇다. 가부장적 사회의 폭력성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까를 고민했다.”(이민복)
현장검증 사진 속의 만찬상과 비슷한 것은 SUN이나 거북선 같은 담배 말고는 거의 없다. 소탈한 음식이 실제로 차려졌지만 영화에선 시각적 효과를 위해서 붉은 바닷가재를 올려놓았다. 처음엔 붉은 색상과 살점을 파먹고 난 다음의 뼈 등을 통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견하게 하기 위해 붉은 도미를 올려놓을 생각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