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기이한 세계
와 의 테크놀로지 실험 비교분석
2004년 겨울 우리는 몹시 기이한 이미지로 무장한 두편의 할리우드영화와 맞닥뜨렸다. 낮도깨비처럼 등장한 두 영화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애니메이션 와 케리 콘랜 감독의 어드벤처 . 진작부터 할리우드 영화저널에 푸짐한 기삿거리를 제공해온 두 영화의 비주얼은 옛날 영화나 꿈에서 본 듯 친밀한 동시에 꼭 집어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부류다. 그래서 친숙하지만 있을 수 없는 장소에 놓여 있는 일상적 사물- 냉장고 속의 양말 같은- 과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국내에 먼저 도착한 쪽은 로버트 저메키스와 톰 행크스가 만든 크리스마스 가족영화 다. 모션 캡처를 업그레이드한 ‘퍼포먼스 캡처’ 신기술로 만들어진 이 1억7천만달러짜리 영화는 3D애니메이션과 실사 사이에 일부러 끼워넣은 고리처럼 보인다. 전체 화면은 크리스 반 알스버그 원작의 삽화 그대로의- 오일 파스텔화인데, 캐릭터의 연기만은 영락없는 실사영화의 그것이다. 의 캐릭터들은 보통의 3D 키프레임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한다고 제작진은 장담한다. 인간 배우의 표정과 몸 연기를 디지털 신호로 저장한 다음 그 움직임 위에 캐릭터의 피부를 씌운 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인물 중 무려 다섯이 톰 행크스. 여기에 줄거리를 대입시키자면 산타를 믿지 않는 톰 행크스 소년이 톰 행크스 차장이 모는 북극행 열차를 타고 가는 길에 톰 행크스 떠돌이를 사귀고 결국 톰 행크스 산타를 만난 깨달음을 얻은 다음 톰 행크스 아빠에게 돌아오는 셈이니, 자못 크리스마스 괴담의 풍모까지 띤다.
가 실사영화의 방법으로 만든 3D애니메이션이라면 케리 콘랜 감독의 SF어드벤처 는 2D애니메이션 방식으로 빚어진 실사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 1월13일 개봉을 앞둔 는 제목 그대로 1930년대 사람들이 상상한 미래의 세계를 그린다. 1939년 맨해튼에 정체 모를 거대로봇이 진격해오고 세계의 유수한 과학자들이 실종된다. 원흉은 1차대전 당시 인류의 가능성에 환멸을 느낀 천재과학자 토텐코프. 예전의 연인이기도 한 영웅 파일럿 조 설리반과 민완기자 폴리는 한 솔로와 레아 공주처럼 티격태격하며 나선다. 맨해튼에서 티베트의 샹그리라, 공중에 뜬 항공모함, 해저 기지, 우주선 방주까지 뻗어가는 이들의 호화로운 여정 중 배우와 일부 소도구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하드 드라이브에만 존재하는 신기루다. 즉 컴퓨터그래픽(CG) 이미지들이다. 고전영화의 숭배자인 콘랜 감독은 심지어 영면에 들어간 로렌스 올리비에마저 필름보관소에서 두들겨 깨워 악역으로 캐스팅했다. 블루 스크린에서 배우의 모든 연기를 촬영한 다음 셀애니메이션식의 배경 평면과 구조물, 괴물들을 CG애니메이션, 사진, 자료 필름으로 그려넣은 것이다.
할리우드가 “전무후무한 볼거리”를 약속하는 것은 백화점 바겐세일만큼이나 흔한 일상사다. 하지만 와 의 시도는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 이상의 호기심에 값한다. 요컨대 두 영화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영화의 개념에 복잡한 노이즈를 일으킨다. 모션 캡처나 CG 특수효과는 수많은 영화, 수많은 액션 시퀀스에서 이미 수행된 작업이지만 두 영화는 그 기술들을 영화 전편에 걸쳐 구사해 하나의 양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일급 스타까지 동원하는 자신감을 보였다. 이들의 제작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은, 스크린의 이미지가 최소한 카메라 앞에 존재했기에 실체라고 믿을 수 있다는 영화 관객의 오랜 전제에 균열을 낸다. 카메라의 피사체와 스크린 이미지 사이의 연관성이 극단적으로 파괴된 것이다. 바야흐로 ‘세미 리얼리티’라는 야릇한 조어가 동원될 판국이다. 장르 구분은 그에 비하면 부차적 문제다. 를 제작한 워너는 이 영화를 오스카 실사부문 후보로 밀지, 애니메이션 부문에 출품할지 아카데미에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영화배우노동조합 역시 신경을 곤두세울 만하다. 두 영화는 나 , 의 골룸이 제시한 배우의 정체성, 연기의 본성에 대한 성가신 논의에 다시 불을 지핀다. 디지털 배우를 만드는 의 기술과 죽은 배우를 살려내는 의 시도가 합쳐져 세련되게 발전한다면 어찌 될지 상상하지 않을 캐스팅디렉터가 있을까? “후반작업을 중심으로 필름 메이킹 과정 전반에 점점 파급력을 키워온 디지털 기술이 도구를 넘어 표현 매체가 됐다”는 기왕의 이론을, 두 영화는 일반 관객에게 피부로 실감시킨다.
특히 와 는, 지금까지 영화 만들기의 본론으로 여겨져온, 배우와의 촬영을 최대한 짧고 간략하게, 그리고 계획된 대로 ‘완수’하려고 할 뿐 정작 창의력의 핵심은 프리프로덕션과 후반작업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는 또한 두 영화가 속한 테크놀로지의 흐름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품는 가장 큰 우려의 초점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영화사 진화의 비탈길에서 탄생한 돌연변이로 훗날 회고될 듯한 와 는 서로 다른 야심에서 출발해 한 모퉁이에서 마주친 길동무다. 할리우드의 파워 엘리트 로버트 저메키스와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컴퓨터 부품을 하나씩 장만해 개미처럼 데뷔작을 만든 수줍은 신인 케리 콘랜. 할리우드의 관록은 천지차이지만, 이미지를 최대한 통제해 환상을 영화로 옮기려는 조지 루카스 문파의 정열적인 후예라는 점에서 닮은 두 감독과 동료들이 어떤 욕망을 품고 실험을 고집했는지, 그것이 보편적인 영화 만들기 과정과 어떻게 달랐는지, 또 그들의 경험은 21세기 영화에 어떤 이슈를 던지고 있는지 간략히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