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롤 모리스는 허풍선이와 기회주의자가 판치는 다큐멘터리 세계에서 가치를 잃지 않는 이름이다. 누군가 대통령, 기업인과 시시덕대거나 멍청한 표정으로 프렌치프라이를 잔뜩 물고 다닐 때, 사형에 쓰일 전기의자를 연구하는 사람과 애완동물이 묻히는 공동묘지를 찾아나섰던 그의 작업은 결코 허전한 게 아니었다. 모리스는 온갖 술수와 기법이 아닌 담담함 속에서 매번 삶의 본질과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신비함을 획득하곤 한다. 는 그간 그를 외면했던 미국 아카데미가 다큐멘터리 부문 작품상을 수여한 작품이다. 영화 내내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은 20세기 후반의 가장 논쟁적인 인물(그래서 에롤 모리스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인 로버트 맥나마라. 포드자동차 사장 시절 존 F. 케네디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돼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전 등을 지휘하면서 냉전을 통과했고, 이후 세계은행 총재를 지낸 85살 노인은 2살부터 현재까지의 기억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가 변죽을 때릴 듯하면 바로 치고, 슬그머니 뒤로 빠질 땐 정곡을 찌르는 에롤 모리스와 카메라는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은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그러니 관객이 같이 흥분할 일은 없다). 그의 영화가 진실을 직시하면서도 은유처럼 느껴지는 건 답을 제시하지 않고 유보하기 때문이다. 의 힘은 관객이 계속적으로 답을 구하게 만드는 데서 나온다. 전쟁에 대한 책임 추궁에 이어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는 맥나마라를 결국 가만히 지켜보는 카메라의 여운은 깊고 효과는 크다. 의 부제는 ‘맥나마라의 삶으로부터 얻는 11가지 교훈’이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얻을 수 있는 진실 중 하나는 ‘전쟁의 포화에 휩싸일 땐 아무리 뛰어난 정치가나 군인이라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라크에 무기와 병력을 보내기로 한 그들의 결정을 믿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는 영화 같다기보다 영화다운 다큐멘터리를 지향하는 에롤 모리스 작품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불릴 만하다. 정갈한 카메라와 필립 글래스의 음악도 웰메이드 다큐멘터리의 완성에 일조했다. HD 마스터를 사용한 DVD 또한 최상급이다. 맥나마라가 별도로 준비한 10개의 교훈(영화 속 교훈은 그가 정한 게 아니다)과 20여 시간의 인터뷰 중 영화에서 빠진 24개 장면 등이 부록으로 제공된다. 이에 더해 미국 MGM이 2005년에 과 등 모리스의 초기 걸작들을 DVD로 출시할 예정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