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7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현장 검증 장면. 밧줄에 묶인 김재규가 권총을 들고서 시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10월26일 당시의 만찬상은 녹이 슨 채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비밀리에 촬영한 임상수의 네 번째 영화, 5가지 궁금증 풀어보기
문제적 영화 한편이 영화계를 술렁이게 하고 있다. 강제규&명필름이 제작하고 임상수 감독이 연출한 이다. 1월 하순 시사회, 2월 초 개봉 그리고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시대적 배경이라는 몇 가지 이야기를 빼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호기심과 소문이 화학작용을 이루며 자가발전한 일부 신문 기사들이 12월21일 쏟아지고 이튿날 제작사가 기사 내용을 정정하는 보도자료를 보내는 작은 소란 속에, 베일 뒤에 숨었던 영화의 정체가 아주 조금이나마 옷자락을 내밀었다. 사건 당시 생존자와 유가족의 명예훼손, 나아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법적인 공방을 미리 예단하는 이들도 있고 영화 내용 일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생활과 일제시대에 대한 향수라는 억측도 있었다. 정작 이라는 노래는 영화 속에 없다거나, 영화 속에 나오는 노래는 엔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난 9월부터 12월 초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촬영이 종료된 이 영화의 실체를 본 이는 제작진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과연 이 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이들이 어떤 배역을 맡아 역사를 어떻게 재현했을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편집자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해석이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말은 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잘 맞아떨어진다.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지하실 캐비닛에서 1979년 가을 보안사 요원의 수사 기록을 꺼내 다시 재구성하면 10·26의 진실이 이루어지는가. 임상수 감독의 질문이다. 임상수 감독의 말대로라면 이 작품은 얼개만 10·26에 놓았을 뿐, 실제 인물의 이름을 모조리 바꿨고 대사와 상황을 개성적으로 재구성한 창작이다. 그날 있었던 사건을 객관적으로 복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인물의 사생활을 캐자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숨가쁘게 돌아간 그날, 궁정동 만찬장에서 육군본부 벙커 상황실, 국군병원으로 이어지는 현장에서 잡아낸 사람들의 표정이 영화의 무늬를 이룬다. 무엇보다 쿠데타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착잡한 내면이 영화의 얼굴이다. 이들의 시선을 통해 은 민감한 현대사 한가운데를 불쑥 치고 들어간다. 그러나 이 영화의 무기는 직격탄이 아니라 절대권력에 대한 비웃음이다. 씁쓸한 웃음을 가득 머금고 현대사의 심장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간 . 자 이제 풍문을 걷어내고 을 향해 한 발짝씩.
궁금증 1 : 이란 노래는 과연 나오는가
“나는 그때 그날 궁정동 연회장에 초대된 가수의 입에서 가요가 아닌 엔카가 흘러나왔으리라 확신한다.” 임상수 감독의 이야기다. 일본어는 노래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1910년대생인 각하와 1920년대생인 박 부장은 의미있는 대사나 혼잣말을 가끔 일본어로 하거나, 또는 대화로 주고 받는 장면이 시나리오에는 들어있다. 박 부장이 각하를 쓰러뜨리며 남기는 대사인 ‘누구라도 죽으면 그냥 썩은내 나는 쓰레기’라는 대사도 일본어로 나온다. 일제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일본어로 대사를 나눌 수도 있다는 발상은 한편으로 자연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격적으로 보인다. 고비마다 튀어나오는 일본어 대사는 객석에 긴장감을 주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박대통령이 시해되던 날 만찬에 동석했던 문제의 두 여인. 증인으로 채택된 이들이 15일 오후에 대법정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오른쪽 여인이 바로 <그때 그 사람>을 불렀던 당시의 인기가수 심수봉이다.
김재규를 비롯한 시해 사건의 범인들이 사형판결을 받고 있는 모습.
궁금증 2 : 각하의 사생활은 문란했는가
일부 언론에 소개된 각하의 사생활 운운은 사실과 다르다는 게 영화사쪽의 반박이다. 영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을 정면으로 다루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는 그날 거사를 준비하던 이들의 굳은 입술, 어제까지 친구이자 동료를 오늘 쓰러뜨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각하의 사생활은 영화 속 여인들과 박 부장쪽 경호원, 궁정동 집사 등 주변 인물의 대사에서 아주 잠깐 스쳐가듯 흘러나올 뿐이다.
오직 하루 그날 저녁 만찬장을 향해 소용돌이치며 돌아가는 이 작품의 핵심은 각하의 사생활이 아니라 부패할 수밖에 없는 절대권력, 그리고 절대권력을 움직이던 이들, 또한 그걸 뒤흔들려 했던 이들의 권력생리학이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윤식이 화장실에서 변비에 고통받는 상황을 한번 떠올려보라. 박 부장의 최측근으로 나온 주 과장(한석규)의 볼을 꼬집으며 ‘껌, 안 뱉어’라고 퉁명스레 말하는 정원중의 모습은 또 어떤가. 영화는 가까이는 엄숙주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한국적 남성 집단문화 그리고 멀게는 그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전근대적이고 감상적인 생리를 비웃는 데 주력할 것이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