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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만 잘하면 다인가?

나는 영어공부를 따로 한다는 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기회주의를 뜻하던 시대에 대학을 다녔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 말고는 영어를 잘 못한다. 거의 벙어리, 귀머거리 수준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비록 그것 때문에 불편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부끄럽다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영어만은 아니다. 10여년 전에 우연한 기회로 베이징에서 열린 로자 룩셈부르크 대회에 발표자로 참석할 일이 있었다. 발표문의 작성과 발표는 모두 독일어로 한다고 했다. 독일어 역시 읽는 것 말고는 해본 적이 없었기에 영어보다 상태는 더 처참했다. 중국어 통역이 있었지만, 그건 거의 외계인의 언어였다. 하지만 아마도 다음번인가에 이 난에 칼럼을 쓸 친구 덕분에 논문을 독일어 번역본으로 제출할 수 있었고, 발표문은 그 번역본을 토대로 대강 편집과 교열을 통해서 만들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주제와 목차만 보면 대략 알 만한 내용의 글과 달리 로자의 사상을 푸코와 네그리, 발리바르 같은 이질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뒤섞어 해석해서였는지, 유달리 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가! 중국어 통역을 재통역해주겠다던 후배도 있었지만, 일단 중국어 통역이 거의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고, 그 친구 역시 능숙하진 않아서, 나는 질문자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미안한 웃음으로.

이런 사태에 대해 사회를 보던 네덜란드의 한 교수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델 왜 오나? 한심한 넘!” 아마도 이런 말을 속으로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순간 미안한 마음은 사라지고 열이 치받았다. “씨X, 지는 한국어 기역자도 모르면서….” 나는 독일어를 읽거나 써도 욕을 먹고, 지는 한국어 한자도 모르면서 뻔뻔스레 남을 욕하고 있지 않은가! 이 비대칭성, 그것은 언어와 겹쳐진 권력, 제국주의적 지배의 산물일 뿐이지….

그 ‘방송사고’ 와중에 옆에 앉아 있던 학회의 회장은 나에게 “이 논문이 이번 대회에 제출된 가장 훌륭한 논문으로 평가되었다”며 말해주었다. 마지막 날 저녁 ‘파티’에서 독일의 늙은 교수 한 사람이 웃으며 다가와 나에게 논문이 재미있었다면서 내년에 유럽에서 엥겔스의 사상에 대한 심포지엄을 할 건데, 참석해줄 수 있겠냐고 말했다. 덕분에 오기로 버티던 마음이 자존심을 찾았다. “그래, 독일어가 문제가 아니야! 독일어 잘하는 넘들이야, 독일 가면 길거리에 흘러넘치잖아!”

그런데 최근에 송년모임에 갔다가 서울대 사회대학에서 교수채용시 영어 발표를 의무화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고려대에선 한국학을 하는 사람조차 영어 발표를 해야 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영어 가르칠 사람을 뽑는 건가? 그런 거라면 미국의 거지들이 더 잘하잖아! 게다가 그런 걸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 생각한다는 걸 듣고는 어이없어 코웃음이 나왔다. “영어 잘한다고 엘리트 될 거면 미국이나 영국은 엘리트 천지겠네! 그래서 그들이 세계를 지배하나보지?”

솔직히 말해 영어 실력 말고는 발표자의 ‘내공’을 알아볼 능력도, 그럴 의사도 없는 사람들, 유학 가서 배운 거라곤 영어밖에 없는 사람들, 지금도 할 줄 아는 거라곤 영어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국의 ‘잘 나가는 대학’을 이처럼 처참하게 만들고 있는 거 아닐까? 중등 학생 시절에는 세계 2, 3위를 다투던 아이들, 거기서도 잘한다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영어 좋아하는 신자유주의식 평가기준으로 보아도 100위, 200위를 넘는 열등생으로 만들어놓는 게 한국의 ‘잘 나가는 대학’들 아니신가!

검은 피부를 희게 만들고 싶다는 열망에 가득 찬, 백인보다 더 백인 같은 흑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들과 달리 저 본토의 대학들은 ‘영어 발표능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외면’한 우리 연구실의 고미숙 선생- 그 역시 나만큼이나 영어를 못한다!- 은 지금 코넬대학에서 한국어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게다가 하버드와 시카고대학 등에서 강연요청이 이어져서, 예정되어 있던 귀국일정이 계속 연기되고 있다. 다들 걱정하고 있다. “이러다가 저 양반 미국 대학에 덜컥 눌러앉게 되는 건 아냐?” 반면 지난달 미국에서 한국학 대회에 참석했던, 유학간 후배들은 미국의 한국학자들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전해준다. “그들이 잘하는 건 영어밖에 없더군요.”

영어, 잘하면 좋지! 영어뿐인가? 불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어떤 것도 잘하면 좋지! 그러나 그것으로 대학교수의 지적 능력을 혹은 사람들의 능력 전체를 재고 확인하려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으로 세상을 재는 어설픈 애꾸눈 개구리의 세계관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