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RTS) 장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웨스트우드’의 <듄2>가 나오면서부터다. <듄> 시리즈는 SF 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로 꼽히는 프랭크 허버트의 <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우주에서 가장 귀중한 물질인 ‘스파이스’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사막 행성 ‘듄’을 둘러싸고 사악한 하코넨 가문과 명예를 중시하는 아트레이드 가문이 투쟁을 벌인다, 여기에 우주의 지배자인 황제와 일단은 중립적 입장인 ‘초암 무역 길드’에 속내를 알 수 없는 초능력자 집단 ‘베네 게세리트’ 등 <듄>은 RTS를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번에 10년 만에 <듄2>의 후속작 <엠페러: 배틀 포 듄>이 출시되었다. 등장인물과 배경 등 기본 구조는 원작과 같지만 스토리는 새롭다. 듄과 스파이스를 놓고 벌이는 하코넨과 아트레이드의 싸움에 교활한 오르도스 가문까지 끼어들어 삼파전을 벌인다.
<엠페러>는 깔끔하게 잘 만든 게임이다. 전략 시뮬레이션이 갖춰야 할 가장 순수한 미덕인 ‘땅따먹기’의 즐거움을 잘 담아내고 있다. 스테이지를 하나씩 클리어해가는 건 곧 듄의 한 지역 한 지역을 정복해나가는 과정이다. 전체 맵을 하나의 색깔로 통일시켜놓는 것, 정복의 즐거움이 <엠페러>를 지배한다. <엠페러>에는 RTS가 갖춰야 할 제국주의적 미덕이 충분하다.
재미있는 건, 소설 <듄>은 이런 종류의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듄>은 대단히 사색적인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국내에서는 명성에 비해서는 인기가 떨어진다. 비교적 빠른 전개의 1권을 제외하고는 좋지 않은 평가가 많고 심지어 SF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듄>에선 종말을 맞이하고 있던 히피문화의 파편들이 SF적 상상력을 매개로 펼쳐진다. 게임에선 ‘스파이스 멜랑게’는 고작 유닛 생산을 위한 자원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설에선 하나의 생명체가 그 존재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물질이다. 스파이스로 인한 각성을 거쳐 정신은 새롭게 탄생한다. 스파이스가 LSD의 메타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파이스 멜랑게’를 놓고 벌어지는 투쟁은 ‘석유’나 ‘황금’을 놓고 벌이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다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코넨이나 황제가 스파이스를 원하는 건, 우주를 항해할 수 있고 따라서 막대한 무역 이익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상업적인 이유에서 스파이스를 통제하려고 한다. 반면 듄의 토착민인 프레맨에 동화된 아트레이드 가문은 정신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주인공 폴 아트레이드는 스파이스와 듄 그리고 우주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운명은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듄>은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운명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더 얽매이는 존재의 고독을 그리는 순환과 반복에 대한 이야기다.게임은 게임이고 소설은 소설이다. 어떤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해서 그 소설을 그대로 재현할 필요는 없다. ‘히피 스타일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땅따먹기라는 인간의 근본적 욕망에 충실한 RTS로 만든 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래도 어딘가 씁쓸하다.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차라리 엉터리 게임이라면 욕이라도 해줄 텐데, 깔끔하게 잘 만든 데다가 모래 행성 듄의 분위기도 멋지게 표현해서 더 기분이 좋지 않다.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