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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안규철(미술가) 2004-12-27

요즘 과일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나온다. 딸기나 참외 같은 것들을 한겨울 동네 슈퍼에서도 흔히 구할 수 있으니, 거기서 예전 같은 감동을 느낄 이유가 없어졌다. 야채는 비닐하우스에서 사시사철 생산되고 과일들은 냉장 창고에 보존된다. 도시 외곽과 농촌의 풍경을 점점 더 낯설게 만드는 이 두 종류의 집은, 시간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타임머신이라 할 수 있다. 공상과학영화의 그것처럼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시간의 흐름에 개입하여 식물의 생장과 소멸에 관여하는 계절의 자연적인 순환을 임의로 조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간 기계’인 것이다. 일년 내내 인공적인 여름 아니면 겨울이 계속되는 그곳에서 계절이라는 말은 무의미해지고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한겨울에 우리가 무심코 집어드는 여름 과일들은 ‘다른 시간’으로부터 우리에게로 건너온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간은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미지의 세계이다. 밤이 오고 다시 날이 밝는 것을 보고, 아이가 자라고 사람이 늙는 것을 보지만, 그때 우리가 보는 것은 시간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우리에게 한 짓(더러는 베풀어준 은총)의 흔적일 뿐이다. 그것이 끊임없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 도도한 흐름 앞에서 우리는 그저 무력한 희생자이며 관객에 불과하다. 우리가 거기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간을 통해서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을 공격하기 위해 또는 시간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우리는 시간의 강을 우회하여 공간을 이용한다. 돌을 깎아 기념비를 세우고 타임캡슐을 묻고 거대한 박물관을 짓는다. 박물관 건축이 요새처럼 보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목적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원래 시간과의 전쟁을 위한 방어진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도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비닐하우스는 가짜 여름을 만든다.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특정한 온도와 습도에 의해 여름이 그대로 재현되고 지속된다. 햇빛과 열기는 받아들이되 고속성장에 방해가 되는 비와 바람과 밤이슬은 차단된다. 그 안에서 식물은 고단위로 압축된 시간, 영원히 계속되는 여름을 경험한다.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밟을 때처럼 시간이 빨리 간다. 반면에 냉장 창고는 ‘겨울의 집’이다. 그것은 저수지의 둑처럼 시간을 가두어 흐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식물의 부패와 소멸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연장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숙명적인 부패의 속도를 최대한 늦춤으로써 그것이 갓 수확되었을 때의 상태를 유지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겨울. 그 안에서 식물은 죽음과 삶 사이, 죽음도 아니고 삶도 아닌 시간을 겪어야 한다. 여기서 신선함이란 오래 지속되는 죽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쪽은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공장이고, 다른 한쪽은 성장이 완료된 열매가 썩어서 다시 씨앗을 틔우게 하는 자연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공장이다. 한쪽은 휴식없는 성장을, 다른 한쪽은 변화없는 휴식, 영원한 가사상태를 무한정으로 연장한다. 한쪽은 삶이, 다른 한쪽은 죽음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 속에서 식물은 속는다. 혹은 속아준다. 가짜 여름을 여름이라고 믿는다. 돼지나 닭이 종족보존을 위해 양돈장이나 양계장에서의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여기서 식물은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식물에 대한 이 성공적인 사기극으로 인해서 우리도 잃어버린 것이 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 결핍을 참고 견디는 인내와 체념, 기다리던 것이 조금씩 다가올 때의 설렘, 그리고 오랜 기다림과 목마름의 대상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을 때의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은 사라져버렸다. 요즘 과일 맛, 음식들의 맛이 예전 같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글·드로잉 안규철/ 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