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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한다고 다 네티즌?

한나라당에서 이른바 4대 입법의 저지를 위해 ‘행동하는 네티즌’이라는 이름의 온라인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성스런 사이버 구국전쟁을 선언하는 자리에는 박근혜 대표도 참석했다고 한다. 여기서 한나라당의 의식이 얼마나 구닥다리인지 드러난다. 그나마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감각을 갖춘 것이 원희룡 의원.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 운동이 외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는 경계의 글을 올렸다. 온라인 게임 해가면서 제법 인터넷 바닥의 논리를 터득한 모양이다.

‘행넷’ 캠페인의 가장 큰 오류는 ‘조직’과 ‘네트워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 조직은 제아무리 민주적이어도 상하의 위계질서를 가진 나무(樹形) 구조다. 반면 네트워크는 제아무리 파쇼적이어도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수많은 점들의 거미줄(網形) 구조를 갖는다. 바로 이 망형 커뮤니케이션이 인터넷의 특성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에서 조직적으로 전개하려는 캠페인은 온라인의 매체적 특성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보화 시대에 제1야당의 정보마인드가 고작 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조직’에서는 메시지가 수직적으로 하달된다. 여기서 수신자는 오로지 수신자로 머문다. 설사 메시지를 송신해도 중앙에서 송신한 것을 중계하는 데 그친다. 반면 ‘네트워크’에서는 메시지가 수평적으로 산포된다. 여기서 수신자는 동시에 송신자다. 그는 남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그것을 릴레이할 뿐 아니라 동시에 자기 메시지를 만들어 송신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방향의 설교의 성격을 띠는 조직의 소통과 달리 네트워크형 소통은 쌍방향의 대화가 된다. 원희룡 의원이 ‘행넷’이 기껏해야 “알바 논란”이나 불러일으킬 것이라 말한 것은 이 때문이리라.

원희룡 의원의 우려에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은 “돈 받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알바냐?”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썰렁하기가 이글루다. 네트워크의 ‘자발성’이란 그 짓을 돈을 받고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송신할 메시지를 스스로 만들어낼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 그것 없이 특정 당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중계하는 이들을 인터넷 바닥에서는 보통 ‘알바’라 부른다. 인터넷을 그저 자기들의 스피커 정도로 여기는 캠페인 자체가 실은 거대한 ‘알바 프로젝트’인 것이다. 이 캠페인을 벌일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얼마 전 재향군인회의 간부가 “5만 사이버 전사”를 양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재향군인회, 참전전우회와 같은 단체의 네티즌(?)이란다.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내가 다녀와서 아는데, 군대라는 곳은 ‘조직’ 중에서도 아주 유별난 ‘조직’이다. 군대가 움직이는 원리와 인터넷이 작동하는 방식은 글자 그대로 ‘상극’이다. 수직적인 위계조직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군대, 교회, 정당. 툭하면 시청 앞에 모여 궐기대회 여는 분들의 인적 구성과 일치한다. 우연일까? 이를, 예를 들어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사람이 모이는 방식과 비교해보라.

소통의 방식뿐 아니라 소통의 내용도 문제다. 저들이 중계하고 다닐 메시지를 미리 들어보자. “애국 네티즌들은 자유민주 이념으로 사상무장, 적진을 향한 불굴의 공격정신, 우군끼리 협조와 희생정신을 갖고 대한민국 침몰을 막아야 한다.” 낡은 병영국가의 저 ‘폐쇄적’ 슬로건은 새로운 인터넷 시대의 ‘개방적’ 문화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한마디로 할아버지들이 늘 입고 다니던 그 칙칙한 군복을 벗고, 백바지에 선글라스, 보라색 머플러로 변신하여 반공궐기대회를 여는 격이다. 그런다고 젊은 오빠가 되나?

인터넷 한다고 다 ‘네티즌’이 아니다. ‘네트’의 원리를 알아야 ‘네티즌’이지. 한나라당은 인터넷을 그저 ‘수단’으로 보는 모양이다. 하지만 인터넷은 한갓 전달 매체이기 이전에 사회적 소통의 새로운 형식이다. 존재는 의식을 결정한다. 네트워크를 조직으로 착각하는 한나라당의 인식론적 오류는, 곧 수직적인 박정희의 병영국가에서 수평적인 정보화 사회로 넘어가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그들의 존재론적 오류의 반영이다.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