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별다른 두려움이 없다. <블레이드 러너>나 <터미네이터> <코드명 J> 등의 암울한 SF영화들에서 종종 드러나는 정체성의 혼란이라든가, 기계의 반란 같은 것에 크게 괘념하지 않는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희미해지고, 기계가 인간의 위에서 모든 것을 관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정체성의 혼란은, 아마도 태초의 인간부터 겪은 것이 아닐까.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면 선악과(혹은 지혜의 과실)를 먹고, 신의 대지로부터 쫓겨난 순간부터 비롯된 것일 게다. 혹은 인간이 ‘동물’에서 자신을 분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것은 각 개인에게도 끊임없이 되풀이된 질문이다. 굳이 종의 발견만이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늘 자신을 의심하게 되어 있다. 그 의심이 멈추는 순간, 인간은 퇴화할 것이다.
기계의 반란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늘,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게 속박당하고 지배되어왔다. 단순한 도구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같은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성이 없는 기계들에 지배된다한들, 절대화된 ‘국가’에 지배당하는 것과 또 무엇이 다를까. 물론 거기에도 수많은 층과 결이 존재하겠지만, 그건 내가 넘본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다. 그런 거창한 문제는,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사회학자가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야 할 과제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 법,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렵지는 않지만 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때로, 귀찮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휴가중이다. 휴가중에 회사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본 적도 없다. 시킨다고 할 생각도 없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바다 건너에서 휴가를 보내는 내가. 만약 10년 전이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휴대폰이 있고, 도처에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지금은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 ‘가능’이 싫다.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을, 굳이 개입하거나 실행하게 만드는 간섭이 싫다. 나는 그것이 지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한다면 거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있다. 이번 경우만 하더라도 나의 불찰은 분명 있다. 연락처를 남겨두는 실수를 왜 저지른 것일까. 살다보면 해이해지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 없이 살아간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제, 컴퓨터 없이는 전혀 글을 쓰지 못한다. 과거 원고지를 빽빽하게 채우고, 연이어 파지를 만들어내던 일이 마치 석기시대처럼 느껴진다. 사냥을 하기 위해 도구가 필요했듯이,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그러나 스스로건, 타인의 의지로건 ‘도구’에 얽매이는 순간 인간은 자유를 잃어버린다. 목적을 잃어버리고 형식이나 시스템에 매달리는 순간 인간의 얼굴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혹시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무서워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잃어버린 무수한 ‘목적’ 때문은 아닐까. 행복이라든가, 자유라든가, 믿음이라든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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