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로부터 “한번 만나서 술이나 먹자”는 내용의 이메일이 왔다. “우리 칭구 아이가” 하면서 격의없이 찧고 까부는 사이는 아니지만, 불알친구의 우정을 커버하고도 남는 ‘동지애’로 똘똘 뭉친 적도 있는 사이다. 그는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장애인이라는 조건 등으로 인해 한국의 대학교에서 ‘좝’을 구하지 못했고, 결국은 서울 강남의 입시학원 원장이 되어 있다. ‘한국의 스티븐 호킹’이 되어서 금의환향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바라지 않는 모습이 되어 있으니 나로서는 난감했다. 이런 난감함이 가끔씩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하는 성향과 만나니 욕을 한 사발 담은 답장이 만들어졌다.
“요즘 애들 뺑 돌게 만드는 사교육을 책임지는 사람과 만나는 일은 불편하다”는 것이 나의 요지였다. 쓰다보니 괜히 흥분해서 제도정치권, 벤처기업계, 입시학원가에 진출한 ‘운동권 출신’들을 “한국 사회의 3대 기생충 집단”이라고 ‘매도’하고(‘권’, ‘계’, ‘가’라는 단어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판’으로 바꿔주시길), “할 짓이 그렇게 없었냐?”라고 쏘아붙였다. 급기야는 현재의 정치 부재, 경제 위기, 교육 붕괴의 주범으로 “바로 그들”을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혹시나 나중에 필력이 쇠잔해지고 노안으로 고통받게 되면 그를 찾아가 ‘학원 경비라도 시켜달라’고 졸라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며칠 뒤 답장이 왔다. 절교 선언이나 다름없는 나의 메시지에 대해 그는 비교적 여유롭게 응수했다. 그는 자기 역시 일종의 ‘낙오자’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하는 일이 그리 상큼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고 답했다. 그리고 어느 장에서든 ‘나름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점잖은 항변도 곁들였다. 불행히도 그점은 내가 더더욱 못마땅해하는 태도였다. 어딜 가서 뭘 하든 ‘먹고살기 위해’ 그랬다면 할말 없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짜증스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번제로 씹어댈 대상을 검색하는 나의 두뇌의 운동 사이클은 때마침 ‘사교육 종사자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게 ‘교육’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 교육이 원래 그런 거라면 몰라도.
이 글의 주제가 ‘한국의 교육, 대안은 없는가’ 어쩌고 하는 건 아니므로 넘어가자. 이 문제는 20년 전 나를 감동시켰던 <민중과 지식인>을 저술하신 장관님께서 알아서 잘하실 테니(정말?) 넘어가자. 오늘의 주제는,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에도 나름의 존엄성을 부여하지 않고는 버티기 힘든 인간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왜 그럴까. 시시껄렁한 일을 한다고 해도 ‘나는 시시하다’라고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럽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누워서 침뱉기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고 별다른가. 이런 글을 쓰는 목적이 생계에 한푼이라도 보태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은 대자보나 팸플릿 쓰는 것으로 착각하니 말이다. 이 잡지의 독자들이 소파에 누워 개비작거리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만 찾아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살기 위한 것이라도 자기를 속이는 행위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표현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망(미련?)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하겠다. 한국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무리 X 같아도 생전에 아작낼 가능성이 희박해진 상황에서는 저것 이상으로 사고를 진전시킬 수 없다. 날로 아사리판이 되어가는 시스템에서 어쨌든 버티고 살아가려면 문화적 취향이 왜 정치적이고, 미학적 인식은 왜 윤리적이고, 문화정치가 왜 갈수록 중요한가에 대해 조금 더 떠들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지면도 부족하고 마감에도 쫓기니 그건 미뤄야겠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 5일 근무제’와 ‘입시교육 철폐’가 필수적이라는 소신만 속으로 복창하고….
게다가 제길, 오늘 저녁에는 딸내미 수학숙제 도와주러 일찍 집에 가야 한다. ‘애들 때는 밖에서 뛰어노는 게 최고’라는 신조는 한두 군데라도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불안, 초조, 긴장, 노심, 우울에 휩싸이는 아이의 모습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 모습을 보면 또 한번 분기탱천하여 ‘할 장사가 없어서 애들 상대로 장사를 하나. 앵벌이 말고 앵벌기도 있구먼’이라고 씨불대겠지만 대책없다. 가족 이야기 나온 김에 나머지 가족 성원에 대한 경고로 마무리. “당신 말야. 학교 때려치우고 학원으로 옮길까말까 하던데 말야, 단디 들으레이. 그랬다간 당장 이혼야,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