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에서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007 작전처럼 첨단기기를 이용해서 집단적인 ‘공작’을 했다고 한다. 들키지 않고 성공했다면 그들은 행복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하든 행복하길 바란다. 나이가 많든 적든, 돈이 많든 적든, 혹은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아마 그들도 행복하게 되는 길일 거라고 믿고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을 얻고 높은 지위를 얻거나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행복하게 되는 게 아님은 누구나 다 안다.
언제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적어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될 때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분명하다. 약간 확대해서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때 행복하게 산다.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공부를 하고 살아야 행복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림을 그리며 살아야 행복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병원에서 수술하며 행복하긴 어려울 것이다. 돈을 버는 삶과 행복한 삶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여러분은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가?” 물론 자신있게 답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사실 이 질문은 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스피노자도 말했지만, 우리의 정신은 신체와 속성이 다르기에 자신의 신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알기 어렵다. 이걸 알려면 자신을 이런저런 활동에 투여하면서 자기 신체를 실험해야 한다. 글도 써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농구도 해보는 등등. 젊은 시절을 훌륭하게 보내는 방법은 아마도 이런 다양한 실험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관찰하고 증진시키는 것일 게다.
다시 묻는다. “여러분은 무얼 하며 살고 싶은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좀더 거창하게 말하면, 인생을 걸고서 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를 묻는다. 이건 자신의 욕망 내지 의지에 관한 것이기에 앞의 것보단 훨씬 쉬운 질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자신있는 표정을 만나기 어렵다. 이 역시 대답을 얻으려면 이런저런 활동에 자신을 투여해보는 실험이, 많은 길을 가보는 시도가 필요할 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답은 물론 질문도 던져보지 않은 채 세상을 산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행복하게 살려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며 사는 인생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을 잘할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 자신의 능력을 긍정하는 것.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그것만으론 불충분하다. 그건 또 한번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 선택의 결과 닥쳐올 어떤 결과도 긍정하는 것.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불행해질 수 없다. 가난도, 세상의 인정을 얻지 못하는 것도, 심지어 세상의 비난조차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산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불행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반 고흐에게 이 두 번째 긍정을 요구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는 많은 ‘실험’의 끝에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잘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래서 그는 모든 걸 던지고 그림을 그렸다. 아마도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닥쳐온 것들마저 긍정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유화만 800여장 그렸지만 돈을 받고 팔 수 있었던 건 단 한장뿐이었다. 가난이야 그렇다고 쳐도, 화가로서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훨씬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동생 말고는 인정해줄 친구 하나 없었다. 그 거대한 고독마저 긍정할 수 있었다면 그는 아마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님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행복을 위해 반 고흐 식의 삶을 권하는 건 바보 같은 몽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사는 삶의 ‘비-불행’이 고흐 같은 삶의 ‘불행’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대신에 ‘흔히들 말하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 그게 바로 우리의 초상이라면, 세간의 기준에 따라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조직적 부정을 시도한 저 아이들보다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