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준비차 방한한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 장 미쉘 프로동
<르몽드>의 영화부문 책임을 맡고 있던 장 미셸 프로동은 2003년 7월 역사 깊은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새 편집장으로 부임했다(첫 번째 편집장의 글을 쓴 건 9월이다). 약 1년 반이 지난 지금, 2005년 1월호 특집기사로 한국영화를 싣기 위해 그가 한국에 왔다. 1980년대부터 폭넓게 아시아영화를 주목해온 <카이에 뒤 시네마>의 일관된 편집방향과 한국영화에 많은 애정을 지닌 장 미셸 프로동 개인의 관심이 동석한 결과이다. 4박5일 중 4일째 되는 날 그를 만났고, 개인에 관한 궁금증에서 시작하여 <카이에 뒤 시네마>의 현재, 그리고 한국영화에 관한 의견을 물어보는 자리로 진행되었다. 세계 영화역사의 커다란 사건이자 동력이 되어온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만나 밖으로부터 다시 안을 되돌아본다.
<씨네21>에 몇 차례 기고한 적이 있지만, 공식 인터뷰는 처음인 것 같다. 우선 개인적인 경력이 궁금하다. 시사 주간지 <르포앵>에서 일하다가 <르몽드>의 영화기자로 옮겼다고 알고 있는데,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서였나.
사실 영화평론을 하기 전까지 많은 일들을 했다. 10년 정도 대안 교육자로 일한 적이 있고, 사진작가도 했었다. 1983년부터 <르포앵>에 들어가서 영화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몇년이 지나 <르포앵>의 영화 섹션 책임자가 됐고, 1990년에는 <르몽드>에서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있었다. 유력 신문인 <르몽드>에서라면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특별한 기획들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옮기게 됐다. 13년 동안 그곳에서 영화기자를 했고, 1995년부터는 영화부문의 책임자로 일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로 옮겨 편집장을 맡고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영화공부를 해왔는가.
특별히 영화공부를 어떻게 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관객으로서 열심히 영화를 보러다닌 것밖에 없다. 영화평론가가 되겠다거나,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인 14살, 15살 때부터 이미 열성적인 영화관객이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것이 내게는 가장 큰 공부였다. 한 가지 꼽자면 어린 시절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를 열심히 읽었다는 점이다. 영화에 대한 사유를 바로 이 잡지에서 배웠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화에 관한 사유와 정치에 관한 사유가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가에 대해 <카이에 뒤 시네마>를 보면서 많이 고민하게 됐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시네필의 길을 걸어온 셈인데,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한 그 시절에 촉발제가 됐다고 할 만한 작품들은 무엇이 있나.
너무나 많은 영화가 있지만, 굳이 꼽자면 고다르, 펠리니와 파졸리니, 글라우버 로샤, 에이젠슈테인, 프리츠 랑, 오슨 웰스, 그리고 70년대 특히 내게 중요했던 감독은 장 외스타슈, 오시마 나기사 등이다.
말했듯이 2003년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맡았다. 2000년에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전 편집장 샤를 테송은 “2000년 12월31일을 기점으로 <르몽드>의 지분이 82%가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에 어떤 변화의 바람이 일었던 것이며, 현재 <르몽드>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운영관계는 어떠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가.
90년대 말에 <카이에 뒤 시네마>를 둘러싸고 몇 가지 문제들이 생겨났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주주들이 지분을 팔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 대상이 <카이에 뒤 시네마>를 인수하여 이름은 유지하되, <프리미어>나 <스튜디오>처럼 상업적인 기사들을 실을 욕심을 가진 매체들이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카이에 뒤 시네마>는 가장 품격있는 잡지이기 때문에 그 제목과 역사의 무게를 자기들의 장점처럼 업고가면서 상업화할 생각이었던 거다. 그 일로 당시 편집장이었던 세르주 투비아나가 나를 찾아왔고, 다른 언론사로 넘어가지 않도록 <르몽드>가 사달라고 부탁했다. <르몽드>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를 인수하면 적어도 편집권을 보장해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몇달 동안 끈질기게 <카이에 뒤 시네마>를 살려야 한다고 당시 <르몽드>의 사장을 설득했다. 몇 개월간의 설득 끝에 지분을 사기로 결단을 내렸지만, 사장은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나보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 가서 편집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했다. 내가 편집장을 맡기보다는 기존의 편집진에게 편집권을 보장해주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98년, 99년쯤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카이에 뒤 시네마>는 또다시 여러 문제들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문제, <카이에 뒤 시네마>와 <르몽드> 사이의 의견 충돌, 기사에 대한 불만스런 지적 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러자 <카이에 뒤 시네마>를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자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마찬가지로 이때 사겠다고 나선 매체들은 90년대와 같이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곳들이었다. 그래서 몇달 동안 다시 매달려 팔지 못하도록 설득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편집장의 자리를 맡으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2003년 7월1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편집장을 맡은 이후 새롭게 주력한 편집방향은 무엇이었나.
내가 편집장을 맡기 이전에 <카이에 뒤 시네마>는 텔레비전 드라마, 비디오 게임, 리얼리티 쇼, 뮤직비디오 등에 관심분야를 넓혀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영역을 넓히면서 진짜 다뤄야 할 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핵심 토대가 여전히 영화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다른 영상물에 대한 기사를 다루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방향만 넓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사유를 기점으로 하는 편집방향을 갖고 가려 한다. 물론,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는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총체적인 영상물에 대한 잡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나 갖고 있다
상업적인 고충은 없나.
그 문제는 언제나 있어왔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잡지와 평론지의 중간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일반 잡지보다는 좀 많이 팔리고, 평론지보다는 좀 적게 팔리는 경향이 있다. 그 점에서 <르몽드>의 도움이 크다. 현재 <카이에 뒤 시네마>의 사업 중 중요한 것 하나가 내년 1월부터 인터넷 사이트를 열려는 계획이다. 최초 발행됐던 1951년부터 현재 2004년까지의 모든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작업 중이다. <르몽드>는 돈을 벌어들이는 수단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역사적 위치와 품격을 지키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다지 수익성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있다.
11월호 표지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이었다. 개봉작 소개 특집기사 중에서도 이 영화에 대한 할애도가 컸다. 필진 10명 중 6명이 그 영화에 별 넷을 줬고, 그중 한명이 당신이다. 예컨대, 아핏차퐁의 <열대병>처럼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는 아시아 감독은 누구인가.
나뿐만 아니라 우리 편집진은 지난 10년간 세계 영화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모두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80년대 이후 아시아영화에 꾸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지아장커, 왕빙, 리팅팜, 허우샤오시엔, 차이밍량, 왕가위, 티엔주앙주앙, 기타노 다케시, 미이케 다카시, 그리고 한국의 홍상수 등이 우리의 명단이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 대해서는 개봉 당시 비중있는 기사를 쓴 바 있다. 물론 임권택 감독이 이 명단에 포함된다.
한국영화 특집기사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한다.
내년 1월호에 낼 생각이다. 한국의 시네아스트들에 대해 자세히 조명하고, 주목할 만한 영화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 한국의 영화 시스템, 특히 산업적인 시스템과 영화제작 지원부문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는 등등의 총체적인 밑그림을 얻기 위해 왔다. 실제로 한국영화가 프랑스에서 인기를 높여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관객에게 영화 한편, 또는 감독 한명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 정도다. 한국영화의 전체 지형도를 그려서 프랑스 관객에게 좀더 심화된 지식을 얻게 해주려는 목적을 갖고 왔다. 또 한 가지, 내년 1월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한국영화 50편을 갖고 규모가 꽤 큰 회고전을 연다. 알다시피 <카이에 뒤 시네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협력관계에 있다. 그 회고전을 위한 실무적인 절차들의 처리도 이번 방문 목적 중 하나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영화가 지닌 어떤 요인들이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게 된 것인가.
개별로서의 한국영화도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나의 관심은 전체로서의 한국영화다. 흥미롭게 생각되는 몇 가지 면면들이 있다. 한국영화는 독창성, 다양성, 역동성을 갖고 있다. 영화제에서 만나게 되는 한국영화들을 보면 예술성을 가지면서도 관객을 외면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점들이 인상적이다. 또 하나는 영화 지원 시스템이다. 프랑스와 똑같지는 않지만 한국은 우리와 유사한 영화 보호 철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국의 영화를 보호하고 있으면서도, 아시아영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그 상황에서 다른 아시아영화들을 도와주고 지원하는 위치에까지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번 취재 기간 동안 어떤 영화감독들을 만났나.
중요성이 아니라 만난 순서대로 이야기하자면 이창동, 임권택, 홍상수, 장선우, 장준환 감독을 만났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각자 성향이 매우 달랐고, 하고자 하는 영화가 모두 달랐다. 봉준호, 김기덕 감독 역시 리스트에 있었지만 봉준호 감독은 차기작 준비 때문에 만나기가 어려웠고, 김기덕 감독은 지방에서 강의가 많아서 만날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된 점이 있을 것 같다.
예술가들만 만난 것이 아니라 제작자, 배급자, 영진위, 문광부 사람들도 같이 만났는데, 개별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영화의 포괄적인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제 등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실미도>를 DVD로 본 것은 좋은 기회였다. <실미도>가 개인적인 예술세계를 다룬 여타 영화들과 동등한 수준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영화가 갖고 있는 역사적 중요도에는 관심이 갔다. 그렇게 많은 관객과 만나게 한 방법과 스타일을 고려했을 때 다른 예술영화들만큼이나 중요한 영화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게 새로운 경험 중 하나였다. 한국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 관해서도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중 하나가 수익구조다. 외국은 수익창출의 구조 중 상영관 이외의 텔레비전이나 DVD의 수익구조가 높은 편인데, 한국은 아직 상영수익 중심이라는 점이 다른 지역과의 차이점인 것 같다.
한국의 시네아스트에 관한 세 가지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임권택 감독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로 알고 있다. 첫 번째, 임권택 감독에 대한 당신 개인의 의견을 듣고 싶다.
개인적으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모든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화 대개는 한 국가의 역사를 짊어지고, 역사와 영화가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 영화가 역사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임권택 감독이 99편 모두 걸작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한 것처럼, 나 역시 내가 본 영화들 모두가 걸작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을 재현하면서도, 인간 사이의 관계, 종교에 대한 물음, 가족에 대한 성찰 등 한국적인 것들을 다루는 그의 영화는 국가와 민족과 영화와 문명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 내게는 소중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마치 존 포드가 그의 영화에서 미국을 다루고, 르누아르가 그의 영화에서 프랑스를 다룬 것처럼, 임권택 감독은 그만큼의 무게로 자신의 영화에서 한국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진은 공통적으로 홍상수 감독에게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홍상수 감독의 무엇을 주목하는가.
내가 홍상수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갖게 된 건 이미 <카이에 뒤 시네마>에 들어오기 전 <르몽드>에서 일할 때 봤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였다. 사실 홍상수 감독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들은 <카이에 뒤 시네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비평계의 상당 부분이 그의 작품에 호의적이다. 그가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특히 아시아영화가 그런 경우가 많은데, 그는 모던한 질문을 던지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란 어떤 것인가, 캐릭터란 무엇인가의 규정에서 독창적인 면을 갖고 있다. 인물들간의 심리적인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뿐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거리두기를 만드는 새로운 영화체험을 제공하는 영화다.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의 이야기를 펼치는 방법은 타 문화권 사람이 봐도 동의할 정도로 예민하고 날카롭다. 말하자면 홍상수는 시네마토그래피의 한 형태를 창조해내는 아주 용기있는 감독에 속한다.
세 번째, 유럽에서 김기덕 감독은 높은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만큼은 홍상수 감독에 비교해 김기덕 감독이 덜 다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홍상수 감독에 비해 김기덕 감독을 덜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를 비롯해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이 홍상수의 영화보다 김기덕의 영화를 덜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덜 다루는 이유는 그만큼 덜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에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이 있다. 그의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강한 에너지, 그것은 특히 분노, 노여움에 가까운데, 그 에너지를 영화적으로 번역하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영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적인 도구들, 장치들이 다소 제한되어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기덕 영화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하는 점에서 예측이 가능하다. 물론 김기덕은 관객에게 쇼크주는 것을 잘하는 듯하지만 김기덕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쇼크들은 사실 좀 제한되어 있는 것 같다. 홍상수 영화의 다양성과 비교할 때 그 쇼크의 효과가 제한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