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절대최강 산왕과의 전장. “팔이 올라가지도 않는다”며 죽어가던 불꽃남자 정대만(혹은 미츠이)은 추격의 절정을 이루는 3점슛 한방을 꽂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나를 몇번이라도 살아나게 한다” . 주간지 인생 9개월차인 나에게도 매주 레이스에서 중요한 승부처를 꼽으라면 영화 촬영현장에서 회식자리를 돌아 클럽에 도착하는 세 코스다. 그리고 이 자리들은 나를 살아나게 한다, 몇번이라도.
먼저 촬영현장에 가면 벤치워머 아니 관객이다. 스탭복을 입지 않은 기자에게 스탭들 시선이 고울 리 만무하다.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는 선수들 사이에 수첩 들고 뛰어든 훼방꾼의 모습을 그려보라. 그러다 조명 세팅이 바뀔 때 재빠르게 움직이지 못해 거치적거리거나 휴대폰이라도 울리면? “알 만한 사람이 왜 저래!” 촬영장에서 떠드는 동네 구경꾼보다 나쁜 놈으로 추락하는 건 한순간이다. 대체로 배우와 감독 주위를 맴도는 저널적 동선도 그러한 어색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되도록 그날 촬영분을 쫑치는 걸 보고 일어나거나 스탭들 이야기를 들으려는 습관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닌 ‘당일 관객’의 나름의 생존전략이다. 그래도 현장은 즐겁다. 손님 혹은 장애물이라는 긴장감, 하지만 꼬치꼬치 캐물어야 하는 밥벌이의 시간, 수십번 테이크를 긴장하며 기다린 슛에서 나는 오케이의 희열, 별것 아닌 웃음나는 상황에서 가끔 날아오는 친근한 눈빛을 만날 때면 “취재 말고 응원차 다시 한번 올게요”라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인다.
회식자리에서는 그래도 그라운드 위의 선수다. 주전은 아직 멀지만. 우리 직장은 주당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회식 시스템이 존재한다. 빈번히 이루어지는 임시 회식 외에도 마감이면 어김없이 정기 회식이 준비된다. 주 회식처는 이름도 요상한 ‘통닭회’. 통닭이면 통닭이고, 회면 회지. ‘도대체 무슨 명칭인가’라고 당연히 항의해본다. 마포 20년 터줏대감 사장님, ‘네온이 불타는’ L선배를 위한 계란 프라이쇼와 삼겹살, 출장에서 가끔 공수되는 위스키와 와인, 앉았던 손님도 일어나는 지정석, 대장 보시다가 늦게 합류하는 편집장님, 튀긴 음식 킬러 고양이 전문기자, 최근 통닭회 사교계의 스타로 떠오른 P기자 등이 이곳의 현재 메인 메뉴다. 칭찬이든 충고든 농담이든 이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은 책 위로 떠오르거나 그 사람의 좌표로 구현된다. 그래서 새겨듣는 편이다. 즐겁게 노는 건 기본.
만물박사 M선배에 따르면 나는 “나이트라이프의 관리”가 요구되는 “놀이중독”이다. 사실 업무사고도 한번 쳤으니 유구무언이다. 정기회식 첫 코스가 파하면 대체로 집으로 향하거나 2차를 간다. 하나 개인스케줄이 잦은 놀이중독자. 특수상황이 아니라면 집중 3년차, 기간으로는 10년차를 드나든 클럽 S는 내 일주일 사이클의 종착역이다. 이곳은 개인종목 경기장이므로 당연히 주전이다. 바에 앉는 사람들은 최소한 2년 넘은 단골,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대체로 얼굴은 다들 아는 것이 상례다. 일하는 스탭과 디제이도 마찬가지. <코요테 어글리>의 바이올렛처럼 거기서 꿈을 키웠다고 할 순 없으나 매주의 개인적인 레이스는 이곳에서 갈무리된다.
세곳의 승부처에서 매번 적절한 플레이를 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언젠가는 개인종목은 포기해야 할 터이지만 그날까지는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루브한 음악 사이로 장래희망을 묻는 사람이 아직은 제일 싫으니까.
김수경 lyresto@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