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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
안규철(미술가) 2004-11-26

40 중반을 넘기면서부터 나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2년마다 한번씩 건강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가는 신세가 되었다. 혈관과 간에 문제가 있던 분의 아들이고, 그 유전적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일 중독자에 각종 기호품의 중독자인 나로서는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년의 나이로 건강검진을 받다보면 사람이 산다는 것의 구차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낯선 의사 앞에서 옷을 벗어 평소에 나 자신조차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내 몸을 드러내야 하고, 보이지 않는 몸의 구석구석에 카메라와 집게가 달린 호스를 꾸겨넣어야 하고, 나밖에는 아무도 볼 일이 없는 액체와 분비물들을 뽑아서 이름 석자가 적힌 통에 담아 제출해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지 않던 것들을 보여주는 이 과정들은,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압수수색이고 능욕이다. 다만 나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게다가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어떤 내면세계를 갖고 있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인간인지는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길고 어두운 터널을 갖고 있는 동물, 열량을 섭취 소비하는 메커니즘, 수명이 절반 이상 소모된 중고품 기계로 다뤄진다. 철저한 유물론의 관점에서 정신적인 요소는 심리적 스트레스와 같이 신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만이 부분적으로 고려된다. 자동차를 점검하는 정비사나 범죄혐의자를 조사하는 수사관의 시선에 나는 내 몸을 맡긴다. 낯선 손길과 이물질들이 마음대로 내 몸을 이리저리 헤집을 수 있도록 그들의 지시에 협조한다.

멀쩡하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병에 걸려 쓰러지는 경우에 대한 공포가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다.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우리를 떠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제공되는 갖가지 의학지식들은 우리의 두려움에 과학적인 근거를 부여하고 그것을 증폭시킨다.

건강검진은 나와 내 몸 사이에 평소와는 다른 관계를 만든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는 둘로 분열된다. 나의 몸은 나의 일부분이지만 ‘나 자신은 아닌’ 대상물이 된다. 위든 간이든 심장이든 나는 내 속에 있으면서 수십년간 나를 부양해온 나의 충실한 동업자들을 신뢰할 수 없는 모반의 용의자로 취급하는 데 동의해야 한다.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으로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왔던 나의 몸은 검진을 의뢰한 나와 따로 분리되어 관찰과 취조, 분석의 대상이 된다. 영원히 내 편인 줄 알았던, 아니 나 자신인 줄 알았던 몸이 실은 구석구석에서 반란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의혹덩어리로, 경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몸이 획책하는 배신은 통상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어서 아직 아무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안심할 수 없다. 가능한 모든 부위를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이 잡듯이 수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음파니 내시경이니 시티촬영이니 하는 첨단 장비와 기술이 이 작업을 돕는다. 몸이 감춰온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그 결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검사의 목적은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미리 발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반란이 다른 부위로 확산되지 않도록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위기에 처하면 꼬리를 잘라버리고 도주하는 도마뱀처럼 나의 몸은 제거나 교체가 가능한 부품들의 집합이며, 그것들을 연결하는 메커니즘은 인공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검사가 끝나면 나는 다시 내 몸과 평소의 관계를 회복한다. 며칠 자제했던 술도 마시고 서로의 손상된 자존심을 위로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은 그 능욕의 기억을 지우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여전히 그것이 언젠가 등 뒤로부터 나를 치리라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다. 우리는 몸에 관한한 의처증 환자들이다.

글, 드로잉 안규철/ 미술가